처음 사 본 드럼 스틱, 무엇이 좋은 것인지도 모른 채 까만색이냐 우드색이냐로 고민하다 하나 장만하고 무작정 드럼을 배우러 홍대를 간 것이 벌써 5개월 전인가 보다. 첫 대면에서 나의 드럼 튜터는 본인이 전공자가 아니고 취미로 시작하여 비전공 연주자가 되었으며 이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있다고 소개하였다. 그는 사뭇 진지하게 이 나이에 드럼을 배우려는 고리타분한 중년 여인을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일단 가르치고 보았는데...
나에게 타악기의 매력이라면 그 두들김의 타이밍 격차가 주는 오묘한 맛이라고 하겠다. 멜로디 연주가 가능한 건반 악기나 관악기, 현악기 등이 그야말로 소리를 선으로 그리는 느낌이라면 타악기는 점을 찍는 행위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 점들이 톡톡 튀다가 화선지에 먹물을 떨어뜨리는 순간, 확 번져나가듯 소리가 온몸으로 울려나가는 느낌이다. 이것은 순식간에 점에서 선을 생략한 면으로의 혁명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우리의 전통 타악기 중 사물놀이는 쇠, 징, 북, 장구 4 개의 악기로 구성되었고 4 사람의 호흡으로 멋진 하모니를 구현해 낸다. 하지만 드럼은 서로 다른 특색을 지닌 여러 개의 드럼들과 심벌즈로 묶여 한 세트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드럼들은 소리의 특색은 물론이요, 소리의 높이를 달리 표현함으로써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 무엇보다 드럼은 오롯이 나 혼자서만 그 모든 것을 핸들링해야 한다는 점 등이 다르며 그것이 나에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공연에서 다른 악기들과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솔로 공연이 아니고서야 마찬가지겠지만 드럼은 드럼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꽉 차서 다른 악기를 굳이 데려오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사물놀이에서 쇠들끼리 소리를 주고받는 장면이 있는데 이를 '짝드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한 음씩 천천히 주고받다가 어느새 우리같은 관객들은 음을 쪼개서 들을 수조차 없는 속도가 되었을 때 그 소리 사이사이로 치고 들어오는 오묘한 조화는 음악을 잘 모르는 이들도 탄성을 자아낼 만큼 환희가 느껴진다. 이때, 소리를 교대하는 과정에서 온 몸이 그 타이밍을 맞추어야만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어갈 수가 있다. 마치 어릴 적 줄넘기에서 두 친구가 줄을 돌리고 있는 사이 줄 밖의 아이가 숫자를 세고 줄의 위아래 위치를 계산하여 정확한 그 찰나를 파고들며 들어가야만 발의 점프가 줄에 걸리지 않고 그대로의 리듬을 깨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이처럼 순간의 찰나, 타이밍, 리듬이 오묘하게 소리와 섞였을 때, 그 악기만의 고유한 속성을 뛰어넘는 어떤 예술의 경지가 펼쳐진다. 날카롭고 차가운 금속성의 쇠, 꽹과리라고도 말하는 그 악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두 개의 쇠들이 환상적으로 끼었다 빠지면서 기가 막힌 타이밍을 마치 뜨개질하듯 엮어내는 소리란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연주하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중심을 잡아주는 소리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징이다. 같은 쇠라도 묵중하고 더 멀리 울려 퍼지게 하는 동일한 간격의 그 울림은 서양 악보로 말하면 마디마디를 표시해 주듯 다른 악기들이 현란한 연주에 길을 잃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쇠가 때로는 조곤조곤, 때로는 깽알깽알 이야기를 쏟아부을 때, 징은 한 번씩 '에헴', 혹은 '그렇지' 하는 추임새를 넣듯 맞장구를 쳐주는 느낌이기도 하다. 또한, 마치 어린아이가 툇마루에 앉아 계신 엄마 아빠를 뒤돌아보며 마당 한가운데서 맘껏 뛰어놀다가 한번씩 와서 안기곤 다시 마당으로 돌아가 하던 놀이를 계속하는 그런 느낌으로, 그것은 아이가 엄마 아빠를 한 번씩 확인하며 얻는 안정감같은 것이리라.
그런데 드럼은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다 해야 한다. 드럼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것이 베이스 드럼이다. 이것은 너무 낮아서 손으로 칠 수가 없으니 킥으로 처리해야 한다. 드럼을 배우기 전에는 모든 드럼 소리는 스틱으로, 손으로만 다 하는 줄 알았다. 공연장에서는 드럼 악기에 가려 연주자의 발이 보이지 않으니 그럴 만도 했고 워낙 뛰어난 연주자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 드러밍은 두 스틱을 눈으로 따라가기도 바쁘기에 발까지는 신경이 가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 베이스 드럼을 한 번씩 발로 밟아 마치 사물놀이에서 징이 하는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데 초보인 나는 4비트를 기준으로 4박자에 한 번씩만 밟아주면 되었다. 오른발에 한 번씩 힘을 실어주는 일이 어렵진 않았으나 페달을 밟는 순간 베이스 드럼을 치고 반동되어 나오면서자꾸만 내 발등을 치고 돌아가는 것이 문제였다. 그 덕분에 한 달 내내 멍들어 퉁퉁 부은 발등이 일주일 간격으로 다 나은 듯할 때쯤 또 멍이 들고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나중에는 발등이 있는 신발을 못 신는 지경까지 되었다. 분명 킥하는 방법이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었으며 나의 드럼 튜터 또한 친절한 설명과 시범을 통해 부단히 교정해 주려고 노력하였다. 이 나이에 드럼을 감히 배우겠다고 나선 용기가 갸륵하다가도 이 나이이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감각에 발등을 희생시켜야 하는 서러움이 함께 교차하는 순간이다. 킥의 방법은 뒤꿈치를 올리느냐, 내리느냐에 따라 힐업(heel up), 힐다운(heel down) 으로 불리는데 어떤 방법을 쓰든지 발등에 상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원리는 간단하다. 베이스 드럼 페달을 밟으면 드럼 부분을 치는 부분을 해머라고 하는데 그 해머의끝부분이 내 발등에 닿기 직전에 다시 페달을 밟아서 재빨리 돌려보내면 된다. 그런데 나는 내 온 발등으로 그 해머 녀석을 다 받아주고 있는 셈이었다. 이 역시 타이밍의 문제이며 내 몸이 그 리듬의 찰나를 찾아내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킥 한 가지 동작만을 연습할 때에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그 순간을 찾아낸다. 발등과 닿을락 말락 할 때 얼른 페달을 밟아 해머의 끝부분을 베이스 드럼쪽으로 보내버린다. 4박자마다 내쉬는 안도의 숨. 오, 드디어 나의 발등은 구원받았는가. 하지만 손으로 스틱을 동시에 사용하며 킥을 하게 되면 여지없이 내 발등은 그 리듬의 지점을 찾아 헤매다 결국 다시 해머와 조우하는 것이 아니냐.
하지만, 나의 발등 투혼은 얼마 가지 않아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4비트, 8비트, 16비트까지 스틱으로 가능해지면서 나의 베이스 드럼 키킹은 때로는 불안정했지만, 악보를 읽어내는 것과 그리고 그것을 몸으로 옮겨내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발도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게 되었다. 이것은 어느 한 쪽이 편안해졌다는 뜻이며 의식이 아닌 감이라고 하는 것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런 순간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어쨌든 나는 아직도 드럼 초보에 지나지 않는 것을. ) 그리고 그 편안한 느낌은 페달을 밟을 때, 밟는 순간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밟기 위해서 들어 올리는 그 찰나의 순간이 중요했음을 깨달았을 때 가능해졌다. 발을 들어 올리는 그 순간과 오른손 스틱을 들어 올리는 그 순간의 짧은 일치감만이 해머가 더 이상 내 발등을 때리지 않도록 그다음 동작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찾은 것이다. 소리와 내 손과 발이 어떤 간격으로 움직였을 때 일체감이 느껴지는지. 그리고 어떤 리듬으로 다시 떨어져 나갔다가 돌아오는지 그 오묘한 타이밍을... 이제 나는 4박자에 한 번씩이 아니라 4박자 모두에 베이스 드럼을 넣게 되었다. 오른발의 동작을 자유롭게 하면서도 두 손의 스틱을 사용하는 데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드디어 페달을 밟을 때 들어 올리는 순간의 타이밍을 느낄 줄 알고 직선의 낙하가 아니라 물결 표시(~)처럼 부드럽게 나의 발바닥이 페달면을 누르고 올라갔다가 다시 누르고 올라가는 흐름에 내 발을 맡길 줄 알게 된 것이다. 드럼을 배우는 사람들이 의외로 스틱을 사용하여 현란한 리듬을 치는 것보다 킥에서의 어려움을 호소한다고 한다. 더블킥이라는 것을 하는 단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가 곧 가야 할 길이기도 하고 다시 나는 내 몸을 제어하는 데서 오는 불편감을 환희의 리듬감으로 바꾸기 위해 발등의 멍 정도가 아니라 뇌의 구조개편을 겪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 앞에 놓인 드럼들과 심벌즈 사이사이, 혹은 동시에 쿵쿵 거리는 모든 경우의 수를 소리로 좇고 있다. 음악은 결국 주어진 음들, 혹은 악기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른 경우의 수가 아닐까. 수백, 수천 가지의 경우 중 나는 겨우 10가지나 했을까? 지금까지 나의 깨달음은 겨우 오른발 하나와 그 타이밍에 관한 것이었다. 최근 도전곡에서 나는 또 하나의 산과 마주했다. 이번에는 왼발. 드럼에서 가장 왼쪽에 위치한 것이 하이햇이라는 심벌즈이다. 두 장의 심벌즈를 위아래로 붙여놓고 그냥 스틱으로 박자만 맞추며 쳐 왔는데 이 하이햇 아랫부분에도 페달이 달려 있다. 베이스 드럼처럼 킥하는 동작은 아니지만 이 두 장의 심벌즈를 위아래로 벌렸다 닫았다 하기 위해서 페달을 역시나 누르고 떼고를 필요할 때마다 해야 한다. 악보에 오픈 표시에는 떼 주고 클로즈 표시에는 밟아주고. 참 쉽죠? 그러나 다시 한번 좌절한다. 오른발 키킹 동작과 왼발 열고 닫는 동작의 타이밍은 정말 다르기 때문이다. 양 발을 거의 따로따로 놀 수 있어야 하며 두 손은 내 앞에 펼쳐진 여러 가지 드럼과 심벌즈들을 콩나물 음표들이 지시하는 대로 주어진 길이에서 쪼개어 사이사이에 넣어 주어야 하니 말이다. 아, 누가 나에게 드럼을 배우라고 하지 않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드럼을 배우며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들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랴마는 부단한 성실의 노력과 연습의 축적, 그리고 내 몸을 제대로 제어해야만 좋은 소리가 나고 그 소리에 기뻐하며 그 소리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손이든 발이든 제 때 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치지 말아야 할 때 치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그 오묘하게 찰진 소리의 경이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드럼을 치기 위해서 스틱을 내리치거나 페달을 밟는 순간뿐만 아니라 들어 올리는 순간의 거리와 속도도 느낄 줄 알아야 그것이 전체의 소리를 채우는 것이라는 사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 순리적인 원리이자 현상이다. 우리가 살면서 포착하는 모든 순간들은 딱 그 한 장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장면의 빈 공간과 저 사람의 이 동작과 저 동작 사이의 여백, 이 사람의 이 말과 저 말 사이에 존재했던 행간의 비밀, 내가 벌인 이 일과 저 일 사이의 상관관계, 내 안의 모든 감정들의 들고 나옴도 다 그 '사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그 '사이'를 잘 포착하고 제어할 때 우리는 진정 외부세계의 리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드럼을 흔히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난 단연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점점 내 몸 사용법을 잊어가기가 쉬울 우리같은 중년들이야말로 드럼처럼 사지를 분할해야하는 활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몸에 더욱 집중할 수 있으며 안그래도 어긋나기 쉬운 세상과의 괴리를 내 몸으로라도 줄일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드럼론이다. 나이가 들수록 머리 쓰는 일보다, 말을 많이 하는 일보다 몸을 쓰는 일을 하라고 하지 않는가. 가드닝도 흙을 만지며 촉각적으로 매우 좋은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만족감을 주는 활동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지인으로부터 권유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취향과 특성에 맞는 코드가 있는 것 같다. 젊을 때 클럽같은 곳엘 가본 적도 없고 음악도 락이나 메탈 음악을 즐기지도 않았지만 드럼을 배우고 나니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락근성이 '이제 왔니?' 하며 빼꼼히 고개를 드는 것 같은, 그리고 내 몸구석 하나하나가 다시 세팅되는 느낌. '쿵칫팟칫, 쿠궁 치지 또로로로 둥' 내 인생의 새로운 리듬을 찾게 해주는 드럼의 세계를 당당히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