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에 관한 수다
"맛있는 커피를 합니다"
맛있는 커피를 한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때로는 솔직 마케팅이 조금은 불편할 때도 있으나 어쨌든 그 내세운 하나로는 승부를 걸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이 문구는 전국에 두 군데 있다는 #가배OO#라는 카페의 것인데 커피맛을 제대로 알기엔 아직 한참 모자란 나의 감각에도 '제대로'란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국적불문, 동네불문 어딜 가나 진을 치고 있는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가 커피 인구는 빠른 속도로 확장시키고 커피취향은 희석시키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커피맛에도 생명력이 있다고 하면 내가 무슨 커피 전문가이거나 커피에 조예가 깊은 사람인 것처럼 오해를 받을까봐 조심스럽지만 정말 커피의 세계를 알게 되면 그 생명력에 닿게 되고 거짓말처럼 나에게 맞는 커피를 찾게 된다. 이런 커피멋을 부리기 시작하니 언젠가부터 동네마다 숨어있는 남다른 로컬 카페를 찾아보는 것이 하나의 임무처럼 되었다. 내게 필요한 아지트로서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 정도의 수고는 일종의 탐색의 재미라 해야겠지. 가끔 그런 곳을 찾으면 꼭 한번은 사장님과 커피 얘길 나눠보곤 하는데 그런 곳은 주로 커피를 내리는 이가 사장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내가 굳이 사장님이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 분주함과 왁자지껄 소리 대신 한가한 커피향을 즐기며 소소한 커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운좋게도 그 분이 카페를 하게 된 사연까지 듣는다. 백발백중 그런 분들은 커피의 매력에 빠져 카페를 하게 된 경우다. 그래서 커피의 매력은 백 가지, 천 가지 밝혀 보았어도 카페 운영자로서 이익에 밝은 경영 노하우는 그리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알게된 카페의 한 사장님은 카페 창업에 대해 조언을 해달라는 나의 질문에 돈을 벌고 싶은 거면 하지 말란다. 나는 속으로 이 분은 이 건물 주인이거나 이미 대단한 자산가로서 영업이익이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제적 자유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봐 물어보진 못했다.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면 무얼 위해 하는거냐고 하니 커피는 끝없는 경우의 수 게임인데 아직도 그 조합의 경우가 다 끝나지 않아서 그걸 찾느라 문을 못닫고 있다며 알듯 말듯한 말을 하고는 특별히 내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커피 중에서 하나 골라 멋지게 핸드 드립을 해주신다. '에티오피아 첼체레 G1 N' 가끔 커피 이름을 보면 암호같기도 하고 사실 나와 같은 일반인들은 에티오피아 커피와 르완다 커피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수확과정과 건조방법, 가공방법 등에 따라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 수 있겠는가. 그저 산미가 있네 없네 정도로 선별을 해 보는 정도이다. 달콤한 향기 안에 상큼한 살구맛이나 레몬그라스 맛이 나고 끝에선 버터나 견과류의 고소한 맛이 난다고 하는 희한한 조합을 처음엔 언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맛이 이렇게 어려워야 하는가. 마치 한 인간에게서 서로 다른 성격이 여러개 발현되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이다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운 것처럼, 그런데 그 사람을 우리는 '테이블'님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처럼 커피들도 이름은 있되 도저히 한 가지로는 말할 수 없는 성향들이 응축되어 있다가 드디어 추출을 하면서 그 정체를 드러내고 그 순간에서야 우리와 만나는 것이다. 추출 과정에서만도 경우의 수는 무수히 많다. 마치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반응이 다 다른 것처럼...커피는 알수록 마치 사람같다. 맛도 향도 이름도 너무나 각양각색이고 각자 자라온 환경과 사연이 너무나 다르며 어떤 변수를 제공하느냐에 따라 결과 또한 너무나 달라지는 것이다.
종종 집에서 원두를 사다가 핸드드립을 해본다. 신선한 원두를 갈아 온 집안 공기를 일단 향기로 기선제압하고 여과지를 먼저 뜨거운 물로 적셔내려주면 분쇄한 커피가루를 부어놓았을 때부터 나는 호흡을 조절하기 시작한다. 왠지 커피를 내릴 때 거품이 올라오는 속도, 커피빵이 부풀어오르는 정도, 서버에 커피추출물이 똑똑 떨어지는 속도에 맞추어 내 호흡은 상당히 예민해진다. 가끔 커피빵이 얼마나 잘 부풀어 오르는가로 그 날의 운을 점쳐보곤 하는데 쫀쫀하게 부풀어오르며 가운데 모인 거품들이 가장자리 벽까지는 닿지 않게 봉긋한 모양이 유지될 때, 그날은 뭔가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반면, 어느 순간 호흡이 흐트러지고 부풀어오르는 듯 하다가 거품을 중심으로 물이 가장자리로 끝내 흘러내려 평평해지는 순간, 그냥 그날의 커피맛은 그저 그런 맛이 되고 왠지 안좋은 예감에 발걸음도 조심하게 된다. 그리곤 찾아지지도 않는 나의 그 손놀림의 실수를 반성하곤 한다. 아. 내가 어디서 무얼 잘못한거지? 커피가 내게 주는 존재감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순간순간의 과정에서 집중하게 하는 것, 그리고 아주 미세한 차이를 감지해보려고 하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컨트롤해보는 것. 우리의 인생도 점과 같은 한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선이 되지 않았는가. 커피가 딱 그렇다. 커피는 단계단계마다 정성을 차곡차곡 잘 쌓지 않으면 그 과정이 오히려 좋은 맛과 향기를 하나씩 하나씩 잃어가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어느 순간의 소홀함이 내가 얻고자 한 것의 한 귀퉁이를 떨어져나가게 하고 결국 그것이 전체를 훼손시키는 일이 되지 않게 하려고 몇 번씩 되새김질해보곤 한다. 어느 과정에서 어떤 변수에 의해 맛과 향기가 수만가지로 엇갈리니 커피야 말로 변수의 예술이라 해야하지 않나.
오늘도 맛있는 커피를 내려보려고 우선 나의 기분상태부터 살핀다. 여러모로 상태가 나쁘지 않다. 이런 날은 이런 기분을 오래도록 유지해야한다. 묵직함과 강렬한 향이 입안과 코끝에 가득할수록 좋다. 마치 진한 초콜릿처럼 단맛과 쓴맛의 그 모순된 조화가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강한 유혹이 되듯이 '인도네시아 만델링'이란 커피는 그와 같다. 강한 향은 달콜함과 쓴 맛을 적절히 입안을 휘감아 딱 기분좋을 만큼만 자극을 준다. 대부분의 커피노트에서는 이런 강렬함을 '남성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혹시 강렬한 여성분들에 대한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편가르기식 표현은 하지 않는게 좋다고 잠시 생각하면서, 굳이 산미를 찾을 이유 없는 오늘 하루를 위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만델링을 핸드 드립한다.
나도 맛있는 커피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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