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집 정원은 과실수들이 참 많다. 살구, 앵두, 토마토, 보리수, 감, 대추, 산딸기, 자두, 포도... 이 나무들이 서로 시기를 달리하여 꽃이 피고 열매 열고 익어갔던 것을 예전엔 미처 생각 못했다. 그저 모두 여름과일들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들의 묘한 시간차를 두고 여름 내내 과일따기를 멈추지 않으시던 아버지는 여러 과일을 뷔페로 먹는 거보다 천천히 릴레이로 먹는 게 낫다 하시며 보리수와 앵두를 구분 못하는 막내딸에게 한 수 가르쳐 주셨다.
"봐라잉, 앵두는 삐쭉삐쭉하니 이파리가 그냥 선이 아니여. 보기에 뭔 솜털 난 모냥 까끌해 보이지? 보리수는 이파리가 선 하나로 쫙 그려졌고 더 빳빳하고 빤들하다잉"
잎을 볼 줄 모르고 멀리서 열매만 보고 아는 척하는 나의 얕은 경험 지식.
올해는 난생처음 내가 보리수를 따 보았다. 자세히 보니 빨간 것만 같았지 보리수는 열매 표면이 마치 토마토 속에 씨 보이듯 옅게 점점점 무늬가 있어 보이고 모양도 조금 길쭉하다. 마치 도토리처럼. 앵두는 무늬 하나 없이 빤질거리는 표면에 정말 구슬처럼 동그랗다.
오늘따라 보리수 맛이 더욱 뜹뜹하고 맛이 없다. 어쩜 이렇게 빨간데 이토록 단맛을 가지지 못했을까. 열매의 맛보다는 깨달음을 얻게 할 그늘이 더 중요했나 보다.
이제 이 정원도, 아버지가 뚝딱뚝딱 만들어냈던 옥상의 저 오두막도, 감나무 옆 몇 개 안 되는 계단에 앉아 마늘이며, 생강이며, 인삼을 하루 종일 씻고 까고 자르시던 아버지의 그 모든 손길의 흔적들도 곧 사라진다.
오늘도 그저 기억에 담아 갈 밖에.
이제 곧 자두가 익어갈 차례. 친정집은 곧 재개발로 사라질 예정이다. 나는 아버지가 이곳에서 굵어지고 주름진 손으로 대문이며 처마며 지붕과 마당 곳곳을 모두 손수 돌보시던 기억과 1년 전 속수무책으로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충격과 상처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
기억은 언제나 힘겨루기다. 어떤 기억이 우세하냐에 따라 의미는 너무 달라지니까.
내 기억도 아직은 힘겨루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