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를 부르지도 울지도 않았다
세상을 배우다 1 -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아문다
바람에도 끄떡없는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바람 부는 날을 골라 둥지를 트는 철새가 있다고 한다. 경기도 연천에서 서울로, 대전에서 군산으로 우리는 철새처럼 이사하며 살았다. 그러나 바람에도 끄떡없는 보금자리를 만들 시간도, 돈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2008년 7월, 대전에서 남편과 함께 7년 동안 이끌던 학원 사업을 정리했다. 무리해서 2호점까지 운영하다 몸도 마음도 다 지쳤지만, 늦둥이가 내 뱃속에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버텨냈을지도 모른다. 배는 점점 불러왔고 서서 하는 수업이 많이 힘들었다. 틈틈이 학원 차량 운행까지 나가야 하는 일은 버거웠다. 늦둥이 출산을 3개월 앞두고 결단을 내렸다.
남편이 먼저 군산으로 내려갔다. 남편 친구가 소개한 사업을 인수인계받고, 우리가 살 전셋집을 구했다. 장마가 끝난 7월 말에 나는 불룩한 배를 안고 뒤뚱거리며 군산에 왔다. 바람 한 점 없이 뜨거운 날이었다. 모든 게 부족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고 나도 적극적으로 그를 도울 거니까 우리만 열심히 한다면 무서울 게 없었다.
남편은 2주간 일을 배웠지만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툴렀다. 도와줄 사람을 구했다. 처음 함께 일한 사람은 걸핏하면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작은 돈이라 몇 번은 거절하지 못하고 빌려주었는데 자꾸 반복되자 남편이 어렵다고 했더니 얼마 뒤 일을 그만두었다.
두 번째로 함께 일한 사람은 행동이 느렸다. 게다가 틈틈이 자신의 집안일을 하느라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일을 끝내지 못했다. 오히려 남편이 일을 마치고 그를 기다릴 때가 많았다. 퇴근이 점점 늦어지자 미안했는지 자기 사업을 해야겠다며 떠났다.
고민 끝에 나이가 지긋한 분이 성실하게 오래 하실 거라고 판단해서 일부러 남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분을 뽑았다. 정말 열심히 하셨다. 그러나 일을 익히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거래처와의 갈등이 생길 때 문제 해결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성실한 분이었지만 6개월을 못 넘겼다.
결국 월급을 올리고 비슷한 일을 해 본 경력이 있는 20대 청년을 뽑았다.
“벌써 결혼도 했더라고. 책임감도 있겠지?”
“어머, 인물이 훤하더니 결혼도 빨리 했네”
우리는 이제야 적임자를 만났다며 좋아했다. 건장한 20대 청년과 함께 하는 남편도 힘이 나는지 그를 동생처럼 생각했다. 한 달에 두 번 집안 일로 조퇴를 하기는 했지만 일은 척척 해냈으니 든든했다. 첫 번째 월급을 받은 다음 날, 청년은 거래처에서 수금한 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큰 금액이라 우리도 사정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청년에게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며칠 뒤, 청년은 일하다 허리를 삐끗했다며 병원에 들어가 누워버렸다. 우리가 문병을 가니 일하다 다친 거니까 산재(산업재해보상보험) 처리를 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더는 일을 안 한다고 잘라 말했다. 청년의 말이 폭탄처럼 터지고 파편은 우리 가슴에 박혔다.
10여 년 전에는 고용보험이나 산재보험을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았던 때다. 직원들이 자주 바뀌었고, 직원이 원해서 보험을 들지 않기도 했다. 청년이 우리와 함께 일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때라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청년의 일까지 도맡아 혼자 하면서 남편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태어나 돌도 지나지 않은 둘째 아이와 열 살인 첫째를 대전에 사는 동생에게 맡기고 남편의 일을 도왔다. 근로복지공단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구제받을 방법을 묻고,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철새인 우리는 주변에 의지할 사람 하나 없어 두렵고 막막했다.
일이 늦게 끝나도 우리는 청년을 만나러 갔다. 좋게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청년의 태도는 점점 거만해졌다. 인사는커녕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주었다. 누워서 TV만 쳐다보는 청년을 뒤로하고 병실을 나오는데 청년의 어머니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세상 일이 다 호락호락하지는 않어. 애기 엄마가 용을 써도 안 되는 일이 있고. 계속 아프다는데 우리 아들 허리 수술도 해야겄어.”
가슴은 무너졌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그녀는 산재보험 안 들었으니 서로 좋게 좋게 합의를 보자고 했다. 나는 싫었다. 설령 보험 가입을 안 해서 벌금을 내야 한다면 합의금보다 더 큰 비용을 치르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두 번 다시 그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간호사에게 부탁해 청년의 주치의를 만났다. 수술이 꼭 필요한 상태인지 물었다. 의사는 전부터 허리가 안 좋았던 것 같다며 이번에 다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했다. 환자가 계속 불편함을 호소하면 수술할 수도 있다며 더 이상은 말을 아꼈다.
근로복지공단에 가서 다시 상담을 받았다. 공단 직원은 일단 사건 경위서를 꼼꼼하게 써서 산재보험을 청구해 보라고 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시키는 대로 서류를 작성했다. 집에 돌아와 공단의 결정을 기다리는 약 일주일 동안 속이 타서 입맛도 없었다. 대전에 있는 아이들 걱정보다 이 일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가 무너질까 더 염려했다.
드디어 공단의 통보가 왔다. 청년이 근무한 기간이 두 달이 채 안 되니 보험료 2개월 분만 납부하면 모든 치료비와 휴직 급여를 공단에서 지불한다고 했다. 나는 만세를 부르지도 울지도 않았다.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철새가 될까 두려워 지나치게 마음을 졸인 게 억울했다. 청년이 잃어버렸다는 돈은 우리가 세상을 배운 수업료라고 생각했다.
그 일로 우리는 맷집이 생겼다. 일하다가 사람들에게 상처 받는 일들이 가끔 생겼지만 그때만큼 절망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새로 만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거리를 두었다는 점이다. 이사 와서 오랫동안 좋은 인연을 만들지 못했다. 아파트에서도 꼭꼭 문을 닫고 살았다.
2010년 어느 봄날, 날씨가 화창해서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1층 주차장에서 나를 보던 젊은 여자가 반갑게 인사하더라.
“저는 103호 살아요. 204호도 아기 소리 나던데, 우리 둘째는 막 돌 지났거든요. 지금 놀러 가도 돼요?”
순간 너무 당황했지만 날씨가 좋아서인가 내 마음이 열렸다.
“커피 마시러 올라오세요.”
군산에 온 지 2년 만에 처음 이웃이 생겼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이 아물게 해 줘야 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