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유토피아가 있다. 어린 시절 나의 유토피아는 헨젤과 그레텔이 숲 속에서 만난 과자집이었다. ‘그런 집이 진짜 있을까? 잠깐이라도 과자집에서 살고 싶다’ 그랬다. 부모가 아이들을 숲 속에 버린 끔찍한 사연도, 과자집은 마녀가 아이들을 유인하려고 만든 덫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철부지 어린 나는 과자집만 꿈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고 철이 드는 것은 아니다.
나이 마흔에 둘째를 안고 처음 문화 센터 수업을 받으러 갔다. 큰아이 어릴 때는 맞벌이로 바빠서 아기들을 위한 수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 10개월부터 만으로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언니 같은 동생이 우리 첫째를 키워 줬다. 늦둥이를 낳기 전까지 나는 육아에 대해 일자무식이었다.
센터의 오감 발달 프로그램은 활동적인 둘째에게 딱 맞는 수업이었고, 엄마가 함께 하니 아이도 낯설어하지 않고 빨리 적응했다. 1주에 한 번 수업이 한 달 정도 이어지자 옆에 앉은 엄마들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도 나눴다. 몇 개월인지, 무엇을 잘 먹는지. 말은 언제부터 했는지 대부분 아이에 관한 얘기들을 수업 틈틈이 나눴다
어느 날, 처음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엄마가 내게 물었다.
“어디 사세요?”
“강북동 서민 아파트요.”
“아~~.”
젊은 엄마는 내게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옆에 앉은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어디 사세요?”
“강남동 브라보 아파트요.”
“어머! 저도 브라보 살아요.”
수업이 끝나고 두 사람은 나란히 유모차를 밀며 친구처럼 걸어갔다. 문화 센터 수업은 그 후로 몇 번 더 있었지만 젊은 엄마도, 나도 서로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브라보 아파트’는 우리가 군산으로 이사 올 무렵 완공을 앞둔 아파트였다. 집을 구하러 다니다가 브라보 아파트 근처를 지나가면서 우리 부부는 그랬다.
“여기 아파트 정도면 살기 좋겠다.”
“위치도 괜찮고, 조경도 멋있고, 새로 지어서 깨끗하겠네."
형편상 우리는 서민 아파트 23평을 전세로 얻었다. 집은 좁아도 동과 동 사이의 간격이 넓어 햇볕도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해서 만족했다. 주차장도 넉넉했고 초등학교, 중학교가 3분 거리에 있는 것도 좋았다. 계약 연장을 해서 2년 더 살기로 했는데 기한이 되기 전에 집주인이 우리에게 아파트 매입을 권했다. 활동적인 둘째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첫째는 곧 6학년이 되기에 넓은 평수로 이사 갈 여유는 없었지만 고민에 빠졌다.
공인 중개사 사무실도 들락거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처음으로 부동산 검색도 열심히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브라보 아파트를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여전히 우리에게 꿈의 아파트였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중개사에게 연락해 집 구경을 한 후에도 여러 번 브라보 아파트를 찾아가 둘러보았다. 그리고 언니에게 전화했다.
“언니, 너무 사고 싶은 집이 있는데 도와줄 수 있어?”
은행에서 1억을 대출받고, 언니에게 2천만 원을 빌렸다. 그렇게 큰 빚은 처음이었다. 내 명의로 된 집을 처음 소유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아파트 값이 떨어지면 어쩌지? 내가 이 많은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 마녀에게 붙잡힌 헨젤과 그레텔처럼 매일 매일 불안했다. 살림살이는커녕 옷도 거의 안사고, 미용실 가는 횟수도 줄이며 서민 아파트 살 때보다 더 궁색을 떨었다.
아파트에 사는 둘째의 어린이집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서로의 집으로 왕래가 잦아졌다.
“툰자 언니는 진짜 살림이 없다.”
“빈이네 5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
이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들이 내게는 상처였다. 그렇다고 그들과 거리를 두며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될 용기도 없었다. 브라보 아파트에 들어왔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서른에 첫째를 낳고 서울 살이 하던 때와 비슷했다.
대위로 군 복무를 마친 남편의 취업으로 서울 신정동 빌라에서 살았다. 신입사원이 된 남편은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쯤 퇴근했다. 갓난아기와 좁은 빌라에서 24시간을 지내다 보니 답답할 때가 많았다. 우리 애마는 서울에 와서는 주차장에서 잠만 자고 있었지만, 아기가 겨우 목을 가눌 때여서 운전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가까운 목동에 ‘행복한 세상’이라는 백화점이 새로 생겼다. 다행히 집 앞 신정역 근처에서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있어 가끔 버스를 탔다.
‘행복한 세상’에 들어가면 나도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넓은 백화점에서 아기를 안고 30분쯤 걷다 보면 금세 지쳤다. 가끔 친구를 만나 밥을 먹긴 했지만, 척척 비싼 물건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행복하기는커녕 더 우울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빈손으로 백화점 셔틀버스에 탈 때는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브라보 아파트에 이사 온 지 1년 만에 언니 돈을 갚고 나니 조금 숨통이 트였다. 그제야 창밖에 활짝 핀 영산홍도 보이고, 초록으로 우거진 나무들도 눈에 들어왔다. 밖으로 나갔다. YWCA가 운영하는 센터에서 영어를 배웠다. 숙제하고 발표하고 다시 학생이 된 느낌은 신선했다.
센터에 오가다 알게 된 직업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존감과 자신감도 생겼다. 상담을 진행했던 선생님의 권유로 상담사 교육도 받고 자격증도 땄다. 그즈음 학교에서 학습 부진 학생들의 상담과 학습 코칭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가는 세상으로 그렇게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한때 동화책에서 만난 과자집이 나의 유토피아였던 것처럼 책과 글 속에서 행복한 세상을 찾았다. 남은 인생은 내가 발견한 세상에서 살고자 반백 살이 다 되어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홈 클래스에서 아이들과 함께 책 이야기를 하는 일이다.
어느 날, 여자 아이와 아이의 엄마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선생님, 우리 아이 잘 부탁드립니다.”
훌쩍 커버린 아이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문화 센터에서 만났던 젊은 엄마는 또렷하게 기억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