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는 인생의 질문이 담겨있다. 답이 아니라 질문. 우리는 책을 읽으며 질문을 마주하게 되고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쫓고 쫒는다. 어느덧 책 읽기를 끝낼 때쯤에는 치열했던 그 질문과의 싸움에서 나름 나만의 결론을 하나 건질 수도 있다. 장렬하게 싸웠다면(책을 열심히 읽었고 소설이 던지는 인생 질문에 나름의 해답을 구하고자 궁리하고 생각을 반복했다면) 말이다. ‘인생이란 이런 거야. 인생에서 중요한 건 이것이 아니라 저것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되뇐다. 점점 내 삶이 단단해져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고전을 다시 들춘다. 한번 읽고 두 번 읽고 반복해서 읽는다. 칼비노가 <왜 고전을 읽는가>의 서두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ㅇㅇㅇ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ㅇㅇㅇ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 변신, 나는 잘 살고 있는가 )
변신은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품이라 할 수 있는 단편소설이다. 기괴하고 수수께끼 같은 작품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프란츠 카프카. 다음과 같은 이 책의 첫 문장은 완전 기괴함의 끝판왕이라 할 만하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첫 문장을 읽고 난 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한동안 멍했다. 가히 이 책은 도끼라 할만했다. 이 독특하고 괴이한 소설을 끝내지 않으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과연 카프카는 소설의 이 엄청난 시작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조마조마해하며 눈을 떼지 못하고 읽어 나간다. 외판원인 그레고르 잠자는 은퇴하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학생인 여동생 뒷바자리를 하며 유일하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는 속된 말로 피똥을 싸며 미친 듯이 그리고 아플 겨를도 없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가족들은그와 너무 상반된 생활을 한다. 내가 직장인이라 그런지, 그런 모습을 보는 내내 나는 불편했다. 그는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여동생 몰래 학비를 준비하며 동생을 놀라게 해 줄 계획까지 갖고 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갑충으로 변하고 가족들은 충격 속에서 이를 받아들이지만 잠자의 존재가 점점 불편해진다. 결국 그레고르 잠자는 서서히 죽어가고 가족의 무관심 속에 놓이다가... 존재감 없이 도우미 아줌마의 손에 의해 가족들이 인지하지도 못한 채 치워지게 된다. 아버지는 직장을 다시 얻고 가족들은 오히려 더욱 활기찬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가족들에겐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잠자는....
책을 읽는 동안 잠자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잠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직장인 혹은 가장의 모습이 아닐까? 나도 직장인으로서 과연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일을 하는 걸까.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사소한 것 하나 하나 걱정하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속으로 외칠 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금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나를 바라봐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잠자가 자신을 좀 더 돌보며 일했더라면. 혼자서 그렇게 고생을 할게 아니라 가족들이 다 같이 그들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자 했다면 어땠을까? 벌레로 변한 자신을 걱정하기보다 경제력이 없어진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힘들어질 상황을 더 걱정하는 잠자. 잠자에게 화가 나다가도 그에게 향했던 시선은 매번 나에게로 향한다. 나는? 잠자에게 화를 내는 이유가 뭘까? 어리석을 만큼 착한 것? 나는 어떠한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족이 있는 직장인이라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래!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상황이 나를 그렇게 몰아가더라도 힘든 상황을 혼자 감내하려 하지 말자. 모든 어려움을 혼자 떠않고 애쓰다 보면 결국 나는 갑충으로 변하게 되고 서서히 주위에 기억되지 못하다가 사라져 갈 것이다. 불쑥불쑥 잠자기 떠오를 때마다 나는 잘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얻은 결론은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존재는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나를 소중하게 여길 때, 내 가족의 행복 그리고 공동체의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솔직한 표현을 쓰자면, <변신>을 읽고 나서 생각했다.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지 말자고..
( 싯다르타, 깨달음은 가르칠 수 없다 )
<싯다르타>는 크게 3개의 여정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 여정에는 부유한 바리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깨달음을 얻고자 사문의 길로 들어선 싯다르타를 그리고 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3년 동안 누더기를 걸치고 사문 생활을 하다가 부처인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자 사문의 길을 끝낸다. 석가모니를 대면한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데.. 번뇌로부터의 해탈은 누구로부터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깨우침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는 부처를 떠난다.
두 번째 여정. 사색이 아닌 감각으로부터 배우고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싯다르타. 감각의 배후에도 궁극적으로 참뜻이 있으니, 이 또한 들어보고 유희할 만 가치가 있다. 그는 기생 카말라와 한 부유한 상인을 만나 속세 속 감각의 휘둘림에 몸을 맡긴다. 처음에는 모든 게 신비롭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지만 서서히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어린 아이나 짐승과 같은 삶 속에 동화되는데. 급기야 자살 충동을 느끼기까지 한다. 문득 오랫동안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 본 지 오래되었음을 깨닫고 그는 홀로 유유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속세를 떠난다.
세 번째 여정. 과거 사문의 길을 떠나오며 강을 건너기 위해 만난 뱃사공이 있었다. 속세를 떠나며 그는 다시 그 강과 뱃사공을 만난다. 싯다르타는 뱃사공이 되고 강과 늙은 뱃사공과 나머지 생을 함께 한다. 강으로부터 늙은 뱃사공으로부터, 아니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통하여 그는 마침내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 모든 생명의 단일성! 그는 이제 운명과의 싸움을 멈추었다. 깨달음의 완성에 도달한 것이다. 친구 고빈다에게 전하는 그의 깨달음의 정수는 내 마음도 함께 움직인다.
"우리가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지." 가르침이라는 것은 그냥 말일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행위요 삶이다.
이 짧은 문장이 가슴 깊이 새겨진다. "깨달음이란 가르침을 통해 얻을 수 없다". 싯다르타가 그의 아들을 조우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응석받이로 자란 그의 아들에게 자신의 깨우침을 전달하고 가르쳐줄 수 없었 듯, 우리도 우리 아이들에게 잔소리만 할 뿐 깨달음을 가르쳐 줄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내 내면에 뿌리를 내린 생각 중 하나가 흔들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책은 나에게 '도끼'와 같은 책이 되었다. 그동안 언어를 통해서 사고가 만들어지고, 어떤 언어에 담기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내 인생의 하나의 상수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상수값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언어나 단어에 앞서 행위가, 삶 자체가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추가한다.
( 밤으로의 긴 여로, 가족에 대한 포용 )
처음 읽은 희곡 작품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 당황했다. 희곡인지 몰랐다. 짧은 분량이니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계속 읽는다. 연극 대본 형식이라는 어색함을 가진채 앞부분을 읽어간다. 말 그대로 나는 연극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이 된다. 배우들의 약간은 과장된 동작과 시선처리, 감정처리 등이 나를 불편케 한다. 점점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빠져든다. 연극을 볼 때 그러한 것처럼.
이 작품은 유진 오닐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담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사후 25년 동안 공연하지 않기를 바랐단다. 그만큼 가족사를 공개하는 것은 유진 오닐에게 고통이었다. 이 책은 그에게 퓰리처상, 노벨문학상, 그리고 미국 최고 극작 가상을 받게 한다. 진실이 콘텐츠가 될 때 가장 훌륭한 작품이 나오나 보다. 관객과 독자에게 진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진정성, 그리고 작가의 진실이 담겨야 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등장인물은 모두 4명이다. 아빠인 제인스 티론, 엄마 메리, 형 제이미, 그리고 유진 오닐 자신인 에드먼드. 이 책은 스토리가 아닌 인물들의 감정을 읽어야 하는 책이다. 스토리는 별로 없다. 책 소개에 나오는 한 단락만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오닐이 아내 칼로타 몬트레이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극'이라고 밝혔듯이, 이 작품은 그를 가장 음울하고 비관적인 작가의 한 사람으로 만든 자신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담고 있다. 가난하고 무지한 아일랜드계 이민 출신으로 연극배우로 성공하지만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가정과 자신의 배우 인생을 망치고 마는 아버지 제임스 오닐, 마약 중독자였던 어머니 엘라 퀼랜, 술에 절어 방탕한 삶을 살다가 결국 알코올 중독 합병증으로 일직 세상을 마감한 형 제임스 오닐 2세. 이들을 발가벗겨서 드러내는 것은 오닐에게 '사랑에 대한 신념'과 용기가 필요한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밤으로의 긴 여로> 작품 해설
이 책은 이틀에 걸친 가족들의 대화다. 서로에 대한 불신, 연민, 증오, 사랑, 죄책감, 안타까움, 신뢰, 이해, 타락, 책임감 등 가족 간에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이 다뤄진다. 그 감정들의 이해가 이 책의 핵심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가 떠오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톨스토이가 써 내려간 안나의 불행은 지어낸 이야기다. 반면 유진 오닐이 써 내려간 에드먼드 집안의 불행은 실제 이야기다.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유지 오닐의 불행은 한 가족의 불행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유진 오닐이 격은 이야기다.
이 작품은 과거 나의 가족을 떠올리게 했다. 어린 시절 내 가족의 모습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진 오닐의 가족들에게 오버랩된다. 성공한 형님에 가려지고, 욕심과 독기로 똘똘 뭉친 할머니에 치이고, 동생들의 뒤치다꺼리하느라 정작 우리 가족이 힘들 때 아무 소리 못하고 순종적이었던 둘째 아들이자 선박 수리공이셨던 아버지. 부잣집 셋째 딸로 곱게만 자라오다 아버지와 결혼한 후 한평생 후회를 달고 살며, 독한 시어머니와 힘없는 시아버지 그리고 많은 시동생들, 그리고 애들 셋을 힘들게 키워오신 엄마. 엄마의 희생으로 우리가 이 정도 컸지만, 난 엄마를 대면하는 상황이 언제나 불편하다. 에드먼드의 가족들이 엄마인 메리를 항상 조심스러워하듯이... 아빠를 향한 끊이질 않는 잔소리와 하소연. 집안의 걱정은 혼자 다 떠안고 가시는듯한 걱정과 시름 섞인 말들. 매사 사건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그 마음까지. 그리고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우유부단하고 잘되는 일 없는 오빠. 마지막으로 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치유되지 않는 화상을 입고 평생을 '평범하지 않은' 고통을 지닌 채 어릴 때부터 애어른이 되어야 했던 나. 유진 오닐 자신을 그린 에드먼드에 나를 비할 수 있을까.
유진 오닐은 <밤으로의 긴 여로>, 이 책을 집필하며 가족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구한다.
“1912년으로부터 이십칠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야 그는 “돌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난 연민과 이해와 용서로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사랑하는 가족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를 끝없이 괴롭히고 방황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그를 최고의 극작가로 키워낸 밑거름이었던 가족들에게 위대한 극의 형식으로 보답한 것이다. 그는 메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밤으로의 긴 여로> 작품 해설
나도 내 가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올까.... 유진 오닐에게 이 작품, <밤으로의 긴 여로>는 고통스러운 가족사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가족을 이해와 용서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독자인 나에게 이 책은 유진 오닐의 가족사에 비춰 내 가족,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끔 해줬다는 데 높은 가치를 두고 싶다.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를 생각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어느 심리학 책 보다 더 자신을 치유하는 힘을 얻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