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스토리텔링 할 수 있다면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내 인생 이야기를 남에게 들려줌으로써 내가 아직 잘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기도 한다. 상대방이 점점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급기야 ‘대단하시네요!’라고 반응하면 나는 참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생의 스토리텔링은 뚝딱 나오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하고 기억들을 잇고, 파편화된 사건들을 인과관계로 엮는 등 수없이 생각하고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난 아직도 내 인생 스토리를 채울 어떤 생각과 활동들을 지금도 한다. 내 삶에 이야기가 있기에 나는 행복하다.
( 나의 인생 스토리 )
① 세 살 허벅지에 큰 화상을 입었고, 이는 평생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어릴 적부터 영특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나는 어린 나이에도 뭐든 척척 잘했던 듯하다. 세 살 나이에 집에서 혼자 달고나를 만들어 먹었다.(쓰고 나니 영특함과 달고나는 별 관련성이 없구나…) 그날 따라 집에 친적분들이 여럿 오셨고, 엄마는 거실에서 친척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세 살 때의 유일한 기억으로 그때의 장면만 머릿속에 남아있다. 국자에 설탕을 부은 다음, 국자를 연탄불 위에 올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설탕이 녹는다. 젓가락으로 살살 잘 저어주다가 소다를 살짝 섞어주면 불투명한 살구빛을 띠는 달고나 완성! 그대로 먹을 수는 없다. 쟁반에 부어야 한다. 나는 열심히 엄마를 불렀다. 친척분들과 한창 대화중인 엄마에게 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선을 국자에서 뗀 상태로 열심히 엄마를 부르던 나는 달고나 국자가 조금씩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린 세 살의 나이에...
‘으악’그렇게 달고나 액체는 내 허벅지에 타고 흘러내렸고, 내 오른쪽 허벅지에 평생 치유되지 못하는 화상을 새겨놓았다. 초등학생 시절까지는 내 허벅지의 화상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와 목욕탕도 아무런 생각 없이 드나들었다. 어느 날은 목욕탕에서 20~30대로 보이는 어떤 여자분이 내 흉터를 보고 나를 애처로워하셨다. 그때 나는 그분이 왜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점점 머리가 커지고 내 화상은 부끄러운, 수치스러운 대상이 되었다. 남에게 보이는 안 되는 대상이 되었고, 남에게 보일까 봐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나서길 좋아했고 리더십이 있었던 내가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며 점점 소심해지고 소극적으로 변한 데에 내 오른 허벅지 위 ‘흉터’가 한몫했지 싶다.
스스로의 감옥을 깨고 세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른쪽 허벅지 화상은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무엇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감정적이길 거부했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기계적으로 바라보았다. 화상은 그냥 내 허벅지 위에 있을 뿐이다. 신경 쓸 필요 없고, 감상에 젖을 필요는 없다. ‘결혼’도 안 하겠다고 생각했다.
② 다한증을 극복하고 컴퓨터 학과에 진학하다.
나는 다한증을 가졌다. 심한 다한증이다. 학창 시절 공부를 하다 보면 문제집이 흥건하게 젖곤 했다. 연신 손에 베인 땀을 닦아가며 그렇게 공부했었다. 진로를 고민하던 고등학교 1학년 즈음. 보통의 친구들이라면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을 ‘다한증’이 나의 진로에 방해꾼이 되었다. 나는 컴퓨터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컴퓨터학을 공부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다가도 가끔 특정 이미지가 떠올라 고통스러웠다. 땀이 흥건해진 손으로 타자를 치면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나에게 ‘다한증’은 컴퓨터학과를 진학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혼자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큰 결심을 했다. 그래 컴퓨터학과에 진학하는 거야. 내가 가진 선천적인 ‘다한증’을 극복하고야 말겠다. 그렇게 나는 컴퓨터학과를 진학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자판을 칠 때 생각보다 손에서 땀이 나지 않았고 대학시절 내내 의식하지도 않았다. 두려움은 내가 만든 허상임을 젊은 시절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화상과 다한증을 극복하고 나는 성인으로써 사회에 발을 디뎠다.
③ IMF 시기, 어렵게 취업하여 4년간 첫 직장생활을 하다
1998년 대학교 4학년생이었다. 취업을 해야 하는데 IMF가 터지는 바람에 취업문은 바늘구멍보다 좁아졌다. 시련은 계속된다. 한 학년 윗 선배들까지가 쉽게 취업하는 마지막 학년이었다. 우리 학년이 취업을 하려는 순간 사회로 향하는 취업의 길에는 덜커덩 큰 철문이 닫혀버렸다. 많은 동기들이 대학원으로 진학을 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어디든 취업을 해야 했다. 그렇게 간신히 취업에 성공하고, 회사 내에서는 학벌 좋은 신입사원들이라는 관심 속에서 나의 첫 직장생활은 시작되었다.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사이 대학생 때 만난 지금의 남편과 결혼도 했다. 아이는 없다.중소형 증권회사에서 평생 직장생활을 할 생각은 없다. 그 시절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은 ‘공부’였다. 대학 동기들은 박사과정 진학, 유학.. 승승장구하고 있다. 인생의 후반부에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고 싶다. 한번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점점 지금의 직장에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져 갔다.
④ 28살, 첫 직장 퇴사 후 유학 준비
남편과 상의하고 상의했고 그렇게 우리는 함께 유학을 가자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의 백수생활 겸 공부벌레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남편만 직장을 다니며 우리는 공부만 했다. 주말마다 대학 도서관에 가고, 토플, GRE, 영어 등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그리고 미국의 아이비리그를 포함해 유수의 대학에 지원했다. 나는 석사로, 나이가 4살 많은 남편은 석박통합 과정으로. 과정을 빨리 마쳐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남편이 석박통합에 지원한 건 잘못된 판단이었던 듯하다. 내가 addmisson을 받은 유일한 곳이 제일 가고 싶었던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UCSD)였다. 나는 Computer Science에 Information Search 관련 과로 admission을 받았지만 남편은 어드미션을 받지 못했다.
우리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었다. 첫째, 나만 유학을 떠나고 우리 부부는 학위가 끝날 때까지 서로 떨어져 산다. 둘째, 둘 다 미국으로 가서 나는 공부하고 남편은 현지에서 새로운 plan(재도전, 취업)을 세운다. 셋째, UCSD 입학을 포기하고 둘 다 한국에서 같이 산다. 이 선택지 중에서 선택을 하기 앞서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우리의 경제상황이었다. 우리가 가진 돈은 둘이서 겨우 벌어 모은 전세자금 7천만 원 중 일부인 3천만 원이었다.(4천만 원은 은행 대출..ㅋㅋ) 외국인 학생의 UCSD 한 학기 학비가 5천만 원에 육박하다는 사실은 우리의 고민을 덜어 주었다. 아무리 공부가 하고 싶어도 경제적으로 결핍하다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세 번째 안을 선택했다. 보란 듯이 우리 하고 싶은 것, 공부 말고 다른 거 하면서 함께 행복하게 살자고, 그렇게 남편과 두 손 꼭 잡고 다짐했다.
유학 준비하면서 정말 눈을 뜨고 있는 시간에는 공부만 했다. 지하철 타고 다닐 때면 속도 조절 가능한 카세트를 가지고 다니며 영어테이프를 빠른 속도로 듣고 다녔다. 독후감을 그렇게 쓰기 싫어했던 내가 토플 라이팅 학원을 다니며 영어 에세이 쓰기를 수도 없이 연습했다. 이 기간을 통해 나의 영어가 일취월장했다.
그렇게 공부에 모든 걸 쏟아붓고 나니, 결과야 어떻든 간에, 만족감은 매우 컸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유학 준비하기’이다. ‘유학’이 아니라 ‘유학 준비하기’! 벽이 높아 지레 겁을 먹고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정말이지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이 경험은 내가 평생 간직하고 있는 삶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게 해 주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며 해라. 단 최선을 다해서 해라. 그리고 결과에 연연해하지 마라. 그 과정에서 성취를 얻어라. 그러면 무엇을 하든 후회하지 않으리라.”
‘유학 준비’의 결과는 실패였지만 과정은 성공이었다.
⑤ 행정고시를 준비하다
유학을 포기했으니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나는 공부라면 자신이 있다. 공부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알아보던 중 행정고시가 눈에 들어왔다. 컴퓨터학과를 졸업했으니, ‘전산학’ 전공으로 행정고시를 볼 수 있다. 단 문제는 1년에 전국 1명, 간혹 많게는 3~4명 뽑는다는 사실이다. 하늘의 별따기가 따로 없다. 나는 도전했다. 항상 공부에 임하는 자세는 한 가지다. 1등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와의 경쟁에서 이기는 거다. 100점을 받으면 된다. 그렇게 나의 행시 도전이 시작되었다. 기간은 2년~3년 정도로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
신림동 독서실에 등록하고 매일 출퇴근을 했다. 행정고시 1차는 PSAT라는 일명 수능과 비슷한 시험과 한국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차는 PAST와 한국사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다. 2차는 따로 학원이 없다. 전공과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혼자와의 싸움이다. 기출문제와 대학교재를 가지고 객관식에서 서술형까지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 엄청난 공부량이다. 실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합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차 시험에 합격하고, 가을에 2차 시험을 쳤다. 이번에 붙을 수는 없겠지 생각했다. 이제 고작 1년 째니까.
그 시기에 남편이 한국은행에 지원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매년 공채로 직원을 채용하는데 경제학, 경영학, 통계학, 전산학으로 구분해서 채용한다고 했다. 시험도 기술고시와 비슷하다고 했다. 혹하는 마음에 행정고시 2차 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한국은행에 지원했다. 편한 마음으로 필기시험을 봤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한국은행에 합격했다! 이럴 수가.. 행정고시는 합격했을 경우 지방에서 근무해야 하지만, 한국은행은 서울이 본점이기에 지방에 갈 필요가 없다.(본사 근무 조건일 때)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인생 전환이었다. 그렇게 딱 31살이 되는 순간 한국은행에 입행하여 늦은 신입행원이 되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인생이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한 때 어렸을 때, 나는 인생 루저인가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위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⑥ 사내 국내 학술연수 지원 프로그램에 합격하다
한국은행에서도 언제나 열심히 일했다. 천성인가 보다. 뭐든 열심히 하는 게... 한국은행에는 학술연수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 공부하고자 하는 직원들을 선발해서 등록금을 지원해주는데 그 경쟁률이 장난이 아니다. 나도 그동안 열심히 일한 결과로 고과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얼마 전 우리 팀으로 발령받으신 팀장님이 점점 나의 고과를 깎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팀장님은 본인의 직원 평가 기준은 역량 대비 성과라고 하셨다. 우수하고 능력 있는 직원은 더 높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만 고과를 줄 수 있다고 해서 내 고과는 곤두박질을 쳤다. 반면 코딩이나 업무에 대한 지식이 없이 새로 발령받은 직원이 오히려 1년 내내 연수받으며 높은 고과를 받았다. 평균이 더 낮아지기 전에 학술연수라도 한번 지원해봐야 싶었다. 그동안 열심히 해서 얻은 높은 고과를 이렇게라도 써먹어보지 못하면 나중에 후회할 거 같았다.
그렇게 국내대학원 과정을 지원받는 국내 학술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했는데, TO가 1명이란다. 거의 가능성은 희박했다. 서울대 출신 경제학 친구들로 가득한 지원자들 중에 전산학 전공자인 내가 그것도 경영학 재무전공으로 대학원 지원 계획을 써냈으니 합격은 꿈도 꾸지 못할 처지다. 나를 추천해주신 국장님께서도 학부때랑 다른 전공으로 지원하면 선정 가능성이 낮아진다며 혹시 전공을 학부 전공과 연관성이 있는 MIS로 바꿔 볼 생각이 없냐며 회유했다. 하지만 굳이 MIS를 공부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의 의지대로 끝까지 경영학 재무전공을 고수했다. 1명 뽑는 국내대학원 과정 면접에 최종 10여 명 정도가 참여했다. 면접을 끝낸 후 난 미련을 버리고 편안하게 생활했다. 그런데 내가 합격! 그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내가 합격했단다. 면접에서 나의 진정성이 면접위원들에게 잘 통했던 거 같다. 삶을 대하는 자세 두 번째가 여기서 나온다. “무엇을 하든 진정성을 가져라. 알아주는 이가 분명 나타날 것이다”
국내 학술연수 프로그램은 합격했으니, 이제는 국내대학원을 알아봐야 했다. 국내 학술연수 지원은 공부하는 기간 동안 파견(즉, 출근 안 하고 풀타임으로 공부할 수 있음) 처리해 주면서 등록금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기에, 대학원은 본인이 직접 알아보고 선택하고 입학까지 본인이 다 챙겨서 해야 한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아이들 둘이나 낳으며 머리가 점점 녹슬어 가는데, 걱정도 되고 설레기도 했다. 녹슨 머리를 슬슬 굴려봐야겠다는 각오를 하며, 내 평생 제대로 공부해봐야겠다고 다짐 했다. 주변에서는 편한 게 공부하려면 서울대는 지원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었기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3곳에 지원했고 세 곳 모두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내가 기특했다. 최종 서울대로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⑦ 늦깎이 대학원생이 되다
그렇게 나의 서울대 경영대학원 생활이 시작된다. 늦은 나이게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1학년 1학기가 정말 바빴다. 학교 수업이 없는 시간은 아파트 독서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경영학 학사 과정을 혼자서 공부해야 했다. 경영학 이론이라고는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인강을 들으며 조금씩 조금씩 동기들과의 격차를 줄여갔다.
1학년 1학기 때 등록한 기업 재무 영어강의는 아무것도 모르고 등록했다가, 뜨아 하고 드롭하고는 2학년 1학기 때 재등록했다. 무슨 배짱으로 경영대학원에 지원했는지.. 몰랐으니까 가능했다. 2학년 1학기 논문 수업은 그야말로 빡센 수업이었다. 매주 몇 편의 주요 논문(Journal of Financial, Journal of Behavioral Finance, Review of Economic Studies 등등)을 읽고 공부하고 교수님의 무작위 질문을 대비해야 했다. 게다가 한 논문당 2개 조가 할당되어 한 조는 논문 설명을 나머지 한 조는 논문을 반박하는 자료를 준비해서 프레젠테이션까지 해야 한다. 게다가 개인 소논문도 준비해야 했다. 이 소논문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최종 학기에 devlope 해서 대학원 논문으로 사용한다.
나는 학부 전공인 전산학을 접목할 수 있는 흥미 있는 주제의 논문을 하나 선택했고, 이를 한국의 주식시장에 적용시키는 내용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네이버 검색 지수를 이용한 투자 심지 지표를 만들고 이를 한국의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에 적용했고 기존의 이론들에 부합되는지를 평가하는 내용의 논문이었다. 2015년 1년 동안은 정말 SaS 공부하고 돌리며 논문 작성하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논문은 거의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고 수정하고를 반복했다.
많은 친구들과 교수님이 나의 논문에 관심을 보였다. 네이버 검색 지수를 이용한다는 사실이 신선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대학원 논문 디펜스도 잘 마무리되었다. 논문 디펜스 직후 담당 교수님이 제의를 했다. 나의 논문을 좀 더 develop 시켜서 해외 저널에 pulish 해보자고 했다. 당황스러웠지만 기분도 좋았다. 그만큼 나의 논문을 좋게 봐주신 거니까. 그렇게 나의 논문과 그동안 이용한 기초 자료들과 SaS프로그램 등을 함께 작업할 박사님께 전달하고 설명을 드렸다. 그렇게 박사님이 최종 보완하시고 해외저널에 publich를 진행해주셨고, 박사님과 교수님, 그리고 내가 공동 저자로 ‘Journal of Behaivioral Finace’에 등재까지 되었다.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 기회가 내게 온 것이다. 나의 인생 두 번째 모토 “무엇을 하든 진정성을 가져라. 알아주는 이가 분명 나타날 것이다”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⑧ 한국은행 복귀, 차세대 회계 결제시스템 개발 프로젝트
그렇게 2년의 치열한 공부를 하고 난 뒤, 다시 직장에 복귀했다. 한국은행 전산정보국에서는 한국은행 사상 최대의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는 차였다. 2020년 가동을 목표로 하되, 1차 컨설팅 사업, 2차 본사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1차 컨설팅은 8개월 정도, 2차 본사업은 26개월 예상이다. 준비기간까지 합치면 총 5년이 필요한 사업이다. 2016년 1월은행에복귀한 나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차세대 멤버로 발탁되어 투입되었다. 공식적으로 신회계결제시스템구축팀이 만들어지고 팀장님 이하 5명의 팀원이 참여했다. 그렇게 나의 운명과도 같은 5년의 새로운 국면의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5년 동안 차세대 프로젝트만 생각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발을 헛디디면 이 엄청난 프로젝트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어깨가 무거웠다. 다행인 건 윗분들이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소신껏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믿고 맡겨주었다. 그나마 2차 본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칼퇴근도 하고 나름 정상적인 생활을 했다. 2차 본사업이 시작된 이후로는 정말이지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밥먹듯이 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 읽기도 주춤해졌고, 프로젝트 이외의 일에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초기 멤버이다 보니 내가 관여하고 있는 가지들이 너무 많았다. 프로젝트 참여 직원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것들이었다. 아마 이때는 조직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화’를 많이 품게 된 시기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나마 같이 고생하는 팀원들이 있었기에 서로 토닥이며 프로젝트를 완성해갈 수 있었다.
5년 동안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짹질하며 세뇌시켰다. 최소한의 원칙을 정하고, 그것들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첫째, 악마는 디테일이 있다. 디테일한 부분을 절대로 놓치지 마라
둘째, 의사결정의 지연은 프로젝트를 실패로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다. 의사결정 지연을 야기할 수 있을 만한 것들에 어떤 것들이 있을지 생각해 내고, 미리미리 준비하고 결정해 두자.
셋째, 항상 진정성 있게 일하라. 투명하게 진행하고 항상 공유하라.
이 세 가지를 항상 마음속에 되새기며 5년을 버텼고, 그렇게 한국은행 차세대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오픈했다.
⑨ 내 삶을 찾자. 퇴사하다.
차세대 회계 결제시스템을 오픈하고 나자 무력감이 찾아왔다. 프로젝트 하는 동안 남편과의 대화도 많이 줄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오랜 시간 챙기지 못했다. 내 삶을 찬찬히 다시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즘 행복하지가 않다. 그래서 결심했다. 퇴사하기로. 내 인생에서 한국은행은 15년으로 충분한 것 같다. 100세 인생인데, 이제 내 나이 마흔 중반이다. 정년퇴직을 바라보면 60까지 한국은행에 남는다면, 새로운 삶을 설계하고 도전하기에 어중간한 나이가 되어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가장 큰 가치로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은 우리 인생에서 추구할 가장 큰 가치 중 하나이다. 내 삶은 행복한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마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 차세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는 성취감은 매우 컸다. 만족감도 상당했다. 이는 어디서도 더 이상 얻기 힘든 성취감이었고 직장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끝난 후 일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금 나의 행복은 대부분은 아이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아이들의 웃는 모습, 밥 먹는 모습, 학교 가는 모습을 찬찬히 바라본 적이 없었다. 나에겐 그런 시간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도 필요했다. 어느덧 꼬맹이였던 아이들도 엄마의 손길과 관심이 필요한 나이에 들어섰다.
남편과 아이들과 상의를 했다. 나의 퇴직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계속해서 직장을 다닐 이유가 없었다. 성취? 행복? 이들을 위해서라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게 필요했다.
한국은행을 퇴사했다. 15년간 다녔던 나의 꿈의 직장. 좋은 동기들 직장 동료분들이 있었기에 나의 15년은 다른 의미로 행복했다. 새로운 행복을 찾으며 나는 한국은행에서 나왔다.
⑩ 내 인생 스토리텔링에서 남아 있는 부분들
내 인생 스토리는 여기까지이다. 짧게 적으려고 시작했는데 분량이 많아졌다. 그래도 엄청 축약해서 정리해 보았다. 나는 아직도 설렌다. 인생 스토리가 이제 중반까지 밖에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세 인생에서 나는 아직 50세도 안되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학창 시절, 첫 직장, 유학 준비, 한국은행, 대학원, 차세대 프로젝트로 이어진 만큼, 또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
인생 전반부는 나의 부족한 부분은 극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부지런히 살았다면, 후반부는 나와 가족을 챙기며 조금은 여유롭게 살아보고자 한다.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면서...
인생의 커리어를 생각해 보면 나는 이제 한 텀을 돈 것 같다. 전산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고 관련 전공지식을 살려서 직장생활을 했다. 대학 진학에서부터 퇴사한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20세~45세까지 총 25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따지면 앞으로 내 인생에 두 개의 새로운 커리어를 만들어 갈 수 있을 듯하다. 두 번의 25년이 남아 있느니...
다만 인생이란 어찌 될지 모르니, 죽음이라는 축제가 일찍 온다면 한 번의 추가 커리어로 완성될 수도...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되, 항상 건강하자고 다짐한다. 두 번째 커리어가 마무리되는 60세 즈음에 나의 인생 스토리는 또 어떻게 채워져 있을지 벌써 설렌다.
( 직장을 다니면서 만들었던 스토리텔링 )
워라벨은 이제 진리다. 일(워크)과 가정(라이프)이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가장 바쁜 2여 년의 기간을 보내는 중에도 나만의 라이프를 철저히 구분했다. 회사에서는 인터넷 한번 열어보지 않고 일만 한다. 하지만 퇴근하고 나면 나만의 삶으로 돌아온다. 일이 많아 비명을 지르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규칙이다. 완벽하게 스위치 오프가 되진 않지만,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날 밤 잠들지 못하고 회사일이 정신을 괴롭히게 놔둬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다음날 휑한 눈으로 출근할 수가 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적어두었던 독서기록을 들춰본다. 종이책을 읽을 때와, 발췌한 독서기록을 읽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이다. 나에게 의미 있었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데 도움을 줬던 문구들을 들춰보면 책을 읽을 때 내가 느꼈던 그 감정들이 오롯이 다시 찾아온다.
[에피소드 1] 소로의 <월든>은 그런 문구들이 참 많았던 책이다. 내가 가장 아끼는 책 중에 하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결국 그 책을 읽을 때 나의 상황과 감정을 가장 잘 투영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시기에 나는 옥수수가 밤새 자라듯 성장했다. 그런 시간들은 내 삶에서 공제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평소 허락되는 한도를 훨씬 초과하는 시간이었다. "
2016년에 차세대 시스템 준비하는 팀으로 팀 발령을 받고, 2020년 가을 가동을 목표로, 나에게는 5년의 시간이 주어졌다. 2017년 가을, 월든을 읽을 때는 본사업을 앞두고 PI 컨설팅을 받으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소로의 이 문구는 나의 가슴에 예리하게 다가와 박혔다. 나에게 주어진 5년은 내 삶에서 공제되는 시간이 아니라, 진실로 나에게 평소 허락되는 시간의 한도를 훨씬 초과하는 시간이었다. 하루하루의 몰입을 경험하며, 차곡차곡 누적되어 쌓이는 날들이 모여 나에겐 삶의 여느 시간보다 더욱 알차고 의미 있고 풍부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는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월든을 만나는 시간, 책을 통해 만나는 무수한 경험들과 삶들을 통해 나는 성장했다.
이런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을 때, 2018년 2월 새로운 조직, 차세대 시스템 개발단이라는 조직으로 만들어졌다. 기존 멤버들 그리고 새로 합류하는 멤버들은 창단을 기념하며 점심식사를 가졌다. 마이크 넘기기를 좋아하시는 단장님은 직원들에게 한 마디씩 하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그 시기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월든의 문구를 이야기한다.
"차세대를 준비하고, 가동하기까지 제게 주어진 5년이라는 기간은 직장생활에서나 개인적인 삶에서나 저에게 주어진 한도를 훨씬 초과하는 시간이 되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차세대에 합류한 여러분 모두 남은 2년 반의 기간이 여러분에게 허락된 한도를 초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의미 있는 자리에서 내 머릿속에 가득 찬 이야기는 멤버들에게 진정성 있게 전달이 된 듯한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새로운 사업에 대한 설레임으로 온통 충만해졌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에피소드 2] 차세대 프로젝트 본 개발 사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최인철 교수의 '굿 라이프'를 읽고 있는 중이었다. 이 책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행복이 아닌, 굿 라이프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선했다. 나는 할 일이 넘쳐나서 하루하루가 버겁다 느낄 때에도 ‘굿 라이프’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최인철 교수가 말하는 굿 라이프의 3가지 신호는 우리 삶의 상태를 알려주는 중요한 신호다. 좋은 기분(쾌), 좋은 평가(족), 좋은 의미(의). 이는 좋은 기분, 삶에 대한 만족, 그리고 삶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운전하는 동안 가끔씩 계기판을 확인해야 하듯이, 살아가면서 가끔은 이 세 가지를 체크해봐야 한다. 굿 라이프란 이 세 가지가 양호한 상태다.
차세대 개발단과 함께 본 개발 프로젝트 참여 업체 직원 전원이 인재개발원이 모였다. 마이크 돌리기 좋아하시는 단장님은 급기야 모든 참석자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고리타분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 혹은 우리 직원들, 그리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를 즐겁게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인철 교수의 <굿 라이프>가 떠올랐다.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이 모두 프로젝트에 대한 성공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로젝트가 잘 될 것 같은 기대가 큽니다. 추가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이 굿 라이프 하시라는 것입니다. 26개월의 장기 프로젝트를 하면서 가끔은 쾌, 족, 의라는 굿 라이프의 3가지 신호를 확인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개인의 굿 라이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굿 라이프 하십시오"
내 머릿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은 내용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많은 사람들께 공감 가는 멘트였던 것 같다. 하물며 주사업자가 Good Life!~ LG! 였다는 사실. 쾌(快). 족(足). 의(意).
[에피소드 3] 최인철의 <굿 라이프> 이후, 계속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개념이 있다. 쾌족의 중에서 '의'가 바로 그것이다. '삶의 의미'는 사실 구체적이지 않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어떤 삶이 의미 있는 삶인가? 그러한 모호함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신디의 <강연 읽은 시간>을 통해서 적절한 해답을 얻었다.
에밀리 에스파하니 스미스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4가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삶의 네 가지 기둥으로서 '소속감', '목적', '초월성', '스토리텔링'이 그것들이다. 그녀는 4가지 기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ㅇ 소속감 : 자신을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자신 역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ㅇ '목적' : 목적은 우리의 직업을 찾는 게 라니라 자신의 강점을 이용해 타인을 돕는 데 있으며, 경제적인 것이 아닌 존재에 관한 것이다. 타인이 없다면 나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네가 있기에 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ㅇ 초월성 : 자기 자신을 잊을 정도로 경이로운 순간, 우리가 더 큰 무언가와 연관되어 있다고 느낄 때의 경험이다. 종교, 대자연이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글을 쓸 때도 경험할 수 있다.
ㅇ 스토리텔링 : 자신의 이갸기를 만들면서 일상의 경험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
모호했던 '삶의 의미'라는 개념이 명확히 다가왔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지금의 나의 삶이 의미 있는 삶인지 점검해본다. 나에게 소속감, 목적, 초월성, 스토리텔링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ㅇ 소속감 :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가족은 기본, 그 외 친구들, 그리고 작게는 회사 동료, 차세대는 같이 일하는 파트 개발자 분들.
ㅇ 목적 : 자신의 강점을 이용해서 타인을 돕는 데 있다. 크게는 사회 구성원을 향한, 작게는 조직 구성원을 향해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존재의 목적이라고 생각.
ㅇ 초월성 : 종교 대자연 예술작품에 대한 경외감
ㅇ 스토리텔링 :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 현재의 내 모습이 나의 이야기 속에 담길 수 있도록 하기. 그리고 어떻게 담아나갈지 고민하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요약하면, 소속감과 목적과 스토리텔링은 범위를 좁혀서 현재 차세대 프로젝트를 통해서 의미를 만들 수 있다. 삶의 의미의 발견은 타인이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찾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경험을 하지만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지 못 찾는지는 개인에게 달려있다는 것. 그런데 세 번째 조건인 초월감은 치세대에서 얻기 힘들다. 개인적으로 경외감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꾸준히 모색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예술에 대한 취미를 계속 내가 갈망하는구나라는 생각까지 미친다.
차세대 개발단 회식자리이다. 명동에 위치한 삐꼴로라는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개발단 전원이 함께한다. 단장님은 어김없이 직원들에게 한 마디씩을 하라고 주문하신다. 며칠 전 내 생각의 전부였던 '삶의 의미'에 대해 한마디 한다. 결론은 "차세대 프로젝트를 하면서 이를 통해 소속감, 목적, 스토리 텔링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단, 초월감은 프로젝트가 주기 힘들므로 개인적으로 경외감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꾸준히 모색하십시오. 여기 계시는 모두가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나는 꾸준히 한결같은 방향성을 가진채 나를 만들어가고, 나를 주변에 알리고 있는 중이다. 이러던 중, 이어령 교수님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얻었다.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