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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를 애도하는 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25주년에 부쳐

by 염띠


# 아버지의 전화, 헬기 부대, 안도감

정확히 25년 전인 1995년 6월 29일,

저녁 6시를 넘긴 시간.


중학생이었던 나는 집에서 기말고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바로 내일이 시험이었다.


그때,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화가 난 것은 아닌데, 흥분된 목소리였다.


"엄마! 어디 있어?"
"장 보러 가셨는데요?"
"어디로?"



어디로 장 보러 간지는 나도 몰랐다.


"모르겠는데요?"
"장 보러 어디로 간단 말이 없었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이토록 심각하게 풀어가는 아버지가 못마땅하다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어머니가 양손에 장바구니를 든 채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안도했다. '드디어 이 이상한 토론에서 벗어날 기회다.' "지금 막 왔는데, 바꿔드릴까요?" 나는 의기양양하게 맞섰다. 아버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 잠시 쉬더니,


"됐고, TV 켜봐"


이러고 전화를 그대로 끊었다.

바로 그 순간, TV를 켜려고 거실로 가다가 내다본 창밖의 풍경은 아직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타타타타..... "


창 밖으로 군용 헬기 여러 대가 쉴 새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 영화에서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주택가 하늘 사이로 낮게 비행하는 헬기 부대,

TV에서 전쟁 관련 소식이 나왔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때 TV에 나온 화면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특보였다.


전쟁이 맞았다.


"삼풍백화점이 조금 전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방송국 직원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아직 현장에서 그림이 안 들어왔던 것 같다.

스튜디오에서 앵커가 격앙된 음성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들어온 그림은 참혹했다.

내가 한때, 가족들과 갔었던 장소가 폭파 해체된 건물 잔해처럼 변해있었다.


TV 속 현장에서는 절규와 피울음이 계속되고 있는데,

나는 그 당시 묘한 안도감을 느꼈던 것을 분명하게 기억한다.


'우리 가족이 저기에 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

수화기 너머 아버지의 한숨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나에게 1995년 6월 29일은

아버지의 전화, 헬기 부대, 그리고 안도감

이렇게 3가지로 각인됐다.




# 빈 교탁, 환호성, 등나무 농구

1995년 6월 30일은 더 기억에 남는다.


학교는 조용했고, 아이들은 수군댔다.


붕괴 사고로 우리 학교 학생 몇 명이 희생됐고, 학부모도 여럿 숨졌다는 소식은 먼저,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선생님들은 교무실에서 오전 내내 나오질 않았고,

학생들은 교실에 방치된 탓이었다.


교탁은 한참 동안 비어 있었다.

두어 시간 지났을 까. 교무실에서 나온 선생님은 기말고사가 취소됐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바로 이 장면 때문에 6월 30일이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담임 선생님이 시험 취소를 발표하는 순간,

아이들이 난데없이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던 것이다.


고작 중1 주제에 입시 지옥에서 해방이라도 된 듯한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시험은 물론, 수업도 모두 취소됐다.

그날이 금요일이었으니 요즘 말로 불금이었다.


우리는 초상집에서 세 살 배기가 제사상을 뒤엎듯이,

테니스 공을 등나무 가지에 넣는 농구를 하며 그렇게 반나절을 놀았다.


학교 자체가 거대한 초상집이 되었는데, 시험이 취소됐다고 기뻐하는 꼴이라니. 어느 일본 소설가가 좋아할 만한 그로테스크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내 기억에 1995년 6월 30일은 빈 교탁, 환호성, '등나무 농구'로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 살아남은 건 다행일까?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슬픔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엄마와 형이 희생된 아이. 엄마만 희생된 아이. 아빠만 희생된 아이.

동생만 희생된 아이. 온갖 아픈 사연들이 접수됐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502명.


이 중 손님 피해자의 대부분은 이렇게 친구네 누구, 아는 형네 누구의 집이 꽤 있었다.


문제의 그 6월 30일, 함께 '등나무 농구'를 한 아이들 가운데,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아이도 꽤 있었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다들, 슬픔을 감추고 연극을 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날 웃으며 농구를 했던 아이들은 장례식장의 세 살 배기가 아니라, 상주와 밤새 고스톱을 쳐주는 아저씨들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연극은 오래가지 않았다.


붕괴 5분 전쯤 엄마 손을 잡고, 백화점을 빠져나와

바로 등 뒤에서 붕괴를 목격한 아이는 열흘 가까이 실어증에 걸렸다.


말을 못 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는 전학을 갔고,

친구를 잃은 아이는 결석을 밥먹듯이 했다.


이유 없이 친구를 때린 아이도 있었고,

나는 그 아이한테 이유 없이 맞았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슬픔은 다양한 형태로 변이 하면서 전염됐다.


마지막 생존자가 나온 사고 발생 17일째를 기점으로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삼풍의 희망고문은 그만큼 길어서 모질었다. 한달쯤 지나고 나서야 슬픔에 녹아있었던

약간의 기대감 마저 완전히 증발되었다.


선생님들은 체육활동도 늘리고,

시험도 늦추고 어떻게든 슬픔의 전염을 막기 위해

방역 활동에 나섰지만 슬픔의 창궐을 막지 못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때로는 죽는 것보다 살아남은 게 더 힘들 수도 있구나'


살아남았다는 건 '다행이다' 4글자로 정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끔 잊고 지낼 때가 있지만 매년 이맘때가 되면 그때 내가 목격한 생채기들이 기억 난다.


1995년 6월 29일, 집에서 TV를 보면서 안도감을 느꼈던 나조차도 이런 기억을 떠올리는데, 나보다 더 큰 슬픔에 전염되었던 누군가는 아마 지금 이순간 가슴에 큼직한 흉터를 매만지며 더 아픈 기억을 곱씹고 있을 것이다.




# 오늘은 산 자를 애도하는 날


주말에 가끔 양재시민의 숲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 숲 속에 있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 502명의 위령비를 지나갈 때가 있다.


양재시민의숲 한켠에 마련된 삼풍참사위령탑


99년에는 삼풍백화점에서 아내와 자식을 잃은 한 남성이 이 곳의 나무에 목을 매는 일도 있었다.


이 곳에 위령비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삼풍백화점과도 멀기도 하지만 양재 시민의 숲에서도 도로 건너 구석에, 시민들이 자주 찾는 곳과 뚝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20200711_072304.jpg 이 위령탑은 멀리서보면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인적이 드문 이곳에도 모처럼 사람이 북적일 것이다. 502명을 기억하는 가족들, 친구들까지 수천 명이 찾아올 것이고, 직접 오지 못한다면 아마 마음속에서라도 기어코 이곳을 찾아올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이름들 만큼이나 오늘 이 비석을 어루만지러 온 이들이 어쩌면 그동안 더 큰 고통을 안고 살아왔을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나는 산 자를 애도하고 싶다.

정확히 25년 전, 비록 몸은 살았지만 마음은 함께 죽었을 것이기에.


그래서, 오늘은 산자를 애도하는 날이다.


-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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