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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연 Mar 06. 2021

나무늘보라고 불리는 그녀

  


“어르신, 방금 전에 화장실 다녀오셨어요. 세 번이나 다녀오셨다고요. 이제 주무셔도 돼요.”

“아이 참, 나, 화장실 가야 돼. 놔두고 일 봐요”

라며 부축하는 팔을 기어이 뿌리치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그녀.


낮에는 한없이 조용한 어르신. 거실에 있는 당신의 자리, 늘 같은 의자에 앉아 말없이 TV를 보며 하루를 보내는, 그래서 따로 손 갈 것 없어 누구보다 케어가 편한 어르신. 스스로 이동하고 식사하고 화장실까지 알아서 가는 김연홍(가명) 어르신은 사실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밤이 되면 그녀는 잠자리를 손수 정리하느라 침대 앞에서 1시간 이상을 서성인다. 우선 이불을 각도에 맞게 그리고 당신의 키에 맞춰 구김 한 점 없이 펴 놓아야 하고, 입던 옷을 벗어 칼각이 되게끔 접어놓아야 한다. 양말을 벗어 서랍에 나란히 걸어 두고, 신을 가지런하고 반듯하게 해 놓아야 비로소 침대 위로 아주 조심스럽게 올라간다. 그러고 나서도 그녀는 잠들기 전까지 화장실을 쉴 새 없이 가고 또 간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다. 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고집스럽게 아무 도움도 받지 않으려 한다. 워커도 사용하지 않고 마치 나무늘보처럼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아주 천천히 이동해서 화장실에 가서는 나오지 않는 소변을 보기 위해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휴지를 몇 겹으로 떼어내 닦고 또 닦는다. 이런 반복되는 행위에 상처가 나서 피가 나면 약을 발라 달라고 하며 당신의 몸을 걱정하면서도 그녀는 지나치게 청결에 집착한다.(그러나 웬일인지 코를 풀 때만은 휴지도 없이 손으로 쓱 닦곤 해서 주변 어르신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그녀의 잠자리 습관은 집요할 만큼 정교하다. 문제는 이러한 그녀의 행위가 언제든 낙상의 위험을 불러온다는 사실이다. 

어르신들에게 낙상은 대부분 고관절 부상으로 이어지므로 치명적이며 결국엔 와상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기 십상이다. 

누구보다 자존심 강한 그녀가 와상이 되고 기저귀라도 차게 된다면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될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그만 됐어요, 가 봐요, 고마워요. 내가 할게’라는 말을 들을수록 밤에 부족한 일손으로 모든 어르신들을 돌봐야 하는 요양보호사들의 걱정은 깊어진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하염없이 그녀만을 몇 시간이고 곁에서 따라다니거나 계속 지켜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무표정으로 앉아 있지만, 때로는 가벼운 농담에 얼굴을 붉히며 파안대소하는 열여덟 소녀 같은 그녀가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화장실에 가기를, 빨리 편안히 잠들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엔 그녀가 혼자 이동하려다 넘어져서 얼굴에 멍이 드는 사고가 있었다. 저녁 식사 케어로 정신없이 바쁜 요양보호사들이 손 쓸 틈도 없이, 바닥에 고꾸라지고 난 후에 그녀는 망연히 앉아서 멍한 표정을 한동안 짓고 있었다. 다행히 별다른 부상은 없었지만 스스로 넘어졌다는 사실이 또 큰 충격이었는지 이후 그녀는 더욱 말이 줄었고, 행동도 극도로 신중해졌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사고 이후로 그녀의 치매 증상이 눈에 띄게 심해지고 있다. 안 흘리던 침을 계속 흘리고, 몸이 한쪽으로 자꾸 기울더니 더 이상 혼자 힘으로는 일어서서 화장실을 가지 못한다.

고령이니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들이지만, 누구보다도 자존심 강하고 깔끔했던 그녀가 갑작스레 보이는 이런 무기력한 모습에, 한편으로는 이제 혼자서는 걷지 못할 테니 낙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안심이 되면서도 왠지 서글프고 마음이 아프다. 


노화의 과정이고 수순이라지만 이제 그녀는 날마다 머릿속이 조금씩 하얗게 지워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를 그토록 힘들게 했던 그녀의 고집스러웠던 잠자리 습관도 사라졌다. 휠체어에 맥없이 앉아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어른 아이’가 되어버린 그녀의 모습이 오늘도 낯설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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