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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연 Mar 06. 2021

분노 유발자는 누구?



말도 많고 탈도 많은 801호실에서 늘 한결같은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정숙(가명) 어르신은 몇 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는데, 후유증이 심하고 연하 곤란까지 겹쳐 코도 아닌 배에다 경관을 삽입한 채로 누워서 생활한다. 게다가 말 한마디 할 수 없다 보니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된다. 그저 눈빛으로, 때로는 힘들게 내뱉는 ‘끄응’ 소리로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짐작할 뿐이다.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어서 어디가 불편한지 혹은 어디가 가려운지 알 수 없으니 의도치 않게 그녀는 당신의 뜻이 아니라 요양보호사들의 책임과 의무에 기대어 살고 있는 셈이다. 


경관 줄을 꽂고 와상으로 지내는 어르신의 대부분이 이렇듯 당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고 있다. 몸이 굳거나 뒤틀리는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소량의 액체로 연명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본인의 뜻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밤새 치밀어 오르는 가래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수시로 미열에 시달리며, 이어지는 석션의 고통을 눈물 속에 감내해야 한다. 목욕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1년 내내 당신의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그들은 날마다 살아내고 있다. 혹여 무의식 중에 경관 줄을 뺄까 봐 두 손에 두툼한 장갑을 끼우거나 심지어 안전바에 묶여 있는 채로 말이다.


그녀는 왠지 자주 운다. 잠깐씩이나마 서럽게 우는 이유가 분명 있겠지만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마냥 얌전할 것 같던 그녀도 예전에 배에 꽂혀있던 경관 줄을 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24시간 양손에 방지용 장갑을 끼고 있다. 코나 배로 이어져 있는 경관 줄을 빼게 되면 간호조무사만 있는 요양원에서는 바로 처치를 할 수가 없다. 방문 간호사가 와서 다시 삽입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때까지는 먹을 것을 드릴 수가 없다. 그리고 배에 연결한 튜브의 경우는 코에 연결하는 튜브에 비해 새로 관을 삽입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내가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경관식을 드린 어르신이 그녀였다. 간호조무사와 선임들에게 교육을 받고 또 유튜브에서 동영상까지 찾아 수없이 반복해서 봤지만, 그녀에게 주던 첫 식사는 어찌나 그리 조심스럽던지. 혹여 실수라도 해서 튜브에 공기라도 들어갈까 봐 손이 떨리고, 긴장감 때문에 등에 식은땀까지 흘렸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아무 대화도 할 수 없는 그녀와의 무던한 일상에 뜻밖의 스트레스를 주는 복병이 있다. 그녀의 보호자인 아들이다. 면회 올 때마다 무뚝뚝하게 ‘엄마, 말 좀 해봐. 말 좀 해 봐 엄마’를 습관적으로 뱉는 그녀의 아들은 들어오면서 형식적인 눈인사는커녕 상냥하게 맞이하는 우리 요양보호사들을 전혀 아는 체하지 않는다. 다소 거만한 듯한 무표정에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는 인사말 한마디 없이 거침없이 들어와 그녀에게로 향할 뿐이다. 물론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나이 지긋한 요양보호사들 입장에서는 그런 이유 없는 건방진 태도에 불현듯 화가 나고, 속된 말로 ‘참, 싹수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들이 돌아가고 난 후에 그녀조차 잠시 보기 싫어질 때가 있다.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그는 요양보호사들을 단지 싸구려 노동이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이 보였다. 

‘자신이 모시지 못하는 불편한 어머니를 스물네 시간 돌보고, 어머니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라는 것 따위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인 양 행동하는 그는, 보호자들 가운데 가장 꼴불견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저 가끔씩 와서, 잠깐씩 머물다가, 말하지 못하는 엄마에게 말해 보라고 재촉하고 훌쩍 가버리면서도 말이다. 

보호자들의 유형도 여러 가지이긴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을 상대하느라 감정적 소모가 적지 않은 요양보호사들에게 보호자들의 신뢰에서 나오는 진정성 있는 위로의 한 마디는 큰 힘이 된다. 


그저 지나가는 형식적인 말일지라도 감사하다는 표현이 꼭 필요한 이유다. 

보호자들의 태도를 보면 속된 말로 ‘자식 교육’ 운운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화살은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어르신에게 잠시나마 돌아가기 마련이다.


다행히 상대적으로 상냥한 그의 아내는 남편의 행동을 몹시 미안해하는 눈치다. 그렇다고 그의 불쾌한 행위가 상쇄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며느리 덕에 잠시 갈등했던 그녀에 대한 애정이 식지는 않는다.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그녀의 처지가 불쾌한 우리보다 훨씬 더 안타까운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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