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깨어나는 본능
정우는 지진 대처 매뉴얼을 떠올리려 했으나, 그런 게 떠오를 리 없었다.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주차장 벽에서 지하수가 솟구쳤다. 계단을 뛰어오르던 정우는 다시 차로 돌아와 급히 시동을 걸었다. 멈춰 선 차를 가까스로 피하며 한 층씩 지상으로 올라갔다. 지하 3층을 지날 때 주차장 불이 꺼졌다. 라이트를 켜고 자욱한 먼지를 헤치며 마침내 지상에 도달했다.
그곳은 다른 세계였다. TV에서 보던 우크라이나의 전쟁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방금 회의를 했던 테이블이 2층에서 튕겨져 나왔고, 윤 팀장은 그 아래에 깔려 있었다. 정우는 직감했다. 이것은 방사포의 짓이었다. 그는 전투 경험이 풍부한 707 특임대 소속 교관이었다. 여러 해 동안 대테러 작전을 수행하며 다양한 전투 상황을 겪었지만, 지금 그의 앞에 펼쳐진 상황은 전혀 다른 차원의 공포였다.
‘전쟁이다.’
과천 하늘을 날던 민항기가 성남 쪽으로 향하다 방사포에 맞아 추락했다. 비행기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일동제약 사거리에 불발탄이 꽂혀 있었고, 자동차는 멈춰서 사람들을 쏟아냈다. 사람들은 양재역 지하로 뛰어들었다. 사이렌은 울렸지만, 폭발음에 묻혔다. 귓가에선 ‘삐~~~’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정우는 비현실감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과거 그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익혔던 실전 지침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버퍼링이 걸렸다.
전쟁터에서의 죽음은 삶보다 흔했다. 살아남은 모든 것은 각자 살길을 찾아 숨어들었고, 지상에 남은 건 수많은 주검과 파편들뿐이었다. 주변은 혼란과 공포로 가득했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F-15K Slam Eagle 편대가 북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정우의 눈빛이 바뀐 건 그때였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전투 훈련과 실전 경험을 떠올리며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방사포 재장전까지는 15분. 포격도 곧 멈출 것이다. 우리 군의 반격이 시작되면 포격 강도도 전보다 떨어진다.’
“개새끼들! 월요일부터 지랄이야!”
정우는 707 특임대 소속 교관이었다. 2004년 5월 새벽 3시, 그는 임패리얼 팰리스 호텔에 머물던 국제 테러 조직을 소탕했다.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15층의 타깃까지 은밀히 접근했다. 그의 손에는 목숨과도 같은 HK MP5 SD가 들려 있었다. 대테러 및 근접 전투 상황에서 늘 적을 소리 없이 잠재웠다. 15층 암전. 30초 안에 모든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HK MP5 SD가 불꽃을 참고 낮은 소리를 냈기 시작했다. 이내 불이 켜지고 1503호에선 수트로 갈아입은 부대원들이 유유히 걸어 나왔다. ‘청소 중’이라는 문고리가 그들의 발자국 소리에 맞춰 흔들렸다. 1504호에서 한 남자가 졸린 눈으로 빼꼼히 밖을 바라보다 들어갔다. 도시의 한쪽은 불바다, 한쪽은 물바다였다. 멈춰 선 차를 뚫고 소방차가 달려와 용감하게 물을 뿜었지만, 주유소가 폭발하며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렇게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가 죽어가는 모습이 반복됐다. 소방차의 붉은 불빛이 폭발의 섬광과 섞여 도시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일동제약 사거리에 노란색 버스가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다. 유치원 버스였다. 정우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대피소로 들어가던 남자들 몇 명이 돌아와 함께했다. 분명 아빠들일 게다. 아끼던 아이언으로 창문을 부수고, 한 명 한 명 구출하여 양재역 지하로 들여보냈다. 폭발음이 멈춘 사이 도시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사랑하는 이를 찾았고, 부상자들은 신음소리를 냈다.
포격은 멈추었지만, 도시 인근 주요 시설을 향한 미사일 공격은 이제 시작된 모양이었다. 서울을 지키는 패트리어트 시스템도 본격 가동했다. 여러 방향에서 미사일이 올라가는 것을 보아 PAC-3와 THAD, 철매까지 다층 방어 체계가 모두 작동하는 듯했다. 그러나 날아오는 미사일을 모두 막아내기는 역부족이다. 도시 외곽에서 거대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잠실 롯데타워가 무너지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석촌 호수 속으로 건물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수몰되고 있었다. 정밀 유도 미사일의 의도적인 공격이었다.
정우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먹통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옥외 광고판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영상과 음성의 싱크가 맞지 않아도 내용만은 분명했다.
“속보입니다. 북한이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북한의 방사포와 미사일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수도 서울을 포함한 전국 주요 도시에 피해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즉각적인 대피 명령을 내렸습니다.
가능한 한 빠르게 가까운 지하 대피소나 지하 시설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건물 내에 있다면, 창문과 유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대피하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정우는 포격에 무너진 양재역 8번 출구를 지나 9번 출구로 들어갔다. 지하는 평소에 비해 어두웠지만, UPS 시스템이 가동하여 지상보다는 희망적이었다. 역사 직원들은 비교적 침착하게, 각종 재난 대비 물자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평소에 다니던 연세 치과의원 원장과 정형외과 의사들까지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부상자들이 역 내부에 넘쳐났고, 그들 중 일부는 목숨을 잃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