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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희영 Feb 05. 2022

소설을 연재합니다(4)

위장된 진심은 서로를 속이고 또 서로가 속았지만 사실 그건 너무도 흔해

(4)

 그날 윤재 엄마가 엄마들을 호출한 표면적 이유는 아이들의 ‘수학여행’ 때문이었다. 수학여행은 중국으로 간다고 했다. 여행의 경로와 일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학교 측에서 임원 엄마들에게 팜플렛을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현주 생각에 딱히 엄마들이 준비할 거리는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건 단지 현주 생각일 뿐이었다. 윤재 엄마와 정아 엄마는 원할한 학교 운영을 위해서 엄마들이 해야할 일이 많다고 했다. 수학여행 출발하는 날 담임의 도시락 준비로 시작된 이야기는 반 아이들이 공통으로 입을 티셔츠를 구입하자는 의견과 여행 경비 중 일부를 선생님의 용돈으로 챙겨드리자는 의견 등으로 확대됐다. 현주는 그 어떤 의견도 탐탁지 않았으므로 고개만 두어 번 끄덕이고 말을 삼갔다. 엄마들이 나서는 일은 현주의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신물이 나도록 겪어온 일이었다.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엄마들은 선생님의 도시락을 싸고 과일 바구니를 챙기고 아이들의 간식거리까지 마련했다. 손수 김밥을 싸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근방의 가게에 주문을 넣었다. 입소문이 난 김밥가게는 평소에도 웬만한 슈퍼마켓보다 붐볐다.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문이 쇄도하니, 소풍이라도 가는 날이면 가게는 새벽 5시부터 문을 열었다. 김밥 가게 앞에는 예약해둔 김밥을 찾으러 온 엄마들로 긴 줄이 꼬리를 이었다. 학기 초가 되면 대표 엄마는 회비를 걷었고 그 돈으로 준비한 무언가를 선생에게 전달했으며 소풍을 따라가거나 학급 청소를 하기도 하고 거울이나 시계 같은 물품을 사비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 일을 앞장서서 하는 엄마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녀가 임원이 아니어도 기꺼이 했다. 현주 또한 회비를 내라면 냈고 노동이 필요하다면 참여했다. 즐겁기보다 난처했으나, 나서는 엄마들의 눈 밖에 나는 것도 두려웠다. 그녀들은 책임감도 강했지만 질투심도 만만치 않았고 남의 아이를 함부로 욕하진 않았지만 은근한 뒷담화를 즐겼다. 일테면 “**엄마는 참 착하고 부지런한데 애는 엄마랑 좀 다른 것 같아.”하는 식이었다. 대학 이상의 학벌을 가진, 좀 배웠다는 사람답게 그녀들은 마음속에 능구렁이 하나씩 감춰두고 교양과 예의로 포장하는 것에 철저했다. 위장된 진심은 서로를 속이고 또 서로가 속았지만 사실 그건 너무도 흔해 빠진 일이어서 이미 무감각해진 일이었다. 누구나 자신은 진심이라고 토로했지만 누구든 진심을 확신할 방법이 없었다. 말뿐인 거짓 진심은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다. 때로는 무엇이 진짜 진심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거짓과 진실의 경계를 양심의 가책도 없이 넘나들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진심의 매듭을 풀어내려다가 진심의 매듭을 꽁꽁 묶어버리고 떠나는 일이 아닐까, 현주는 가끔 생각하곤 했다.      


현주가 생각에 빠져 멍하니 앉아있자 윤재 엄마가 나섰다.

"도시락은 주문해 둘게요. 제가 잘 아는 김밥집이 있어요.”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과일이랑 떡도 좀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누가 준비해 주실래요?"

역시 윤재 엄마였다. 현주는 제가 나서야할 상황임을 눈치챘다. 역시나 내키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일방적인 부담을 지우는 건 싫었으므로 현주는 오른 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할게요."

윤재 엄마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근데, 선생님 용돈 문제는 민감한 사항인데, 그건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상희 엄마는 예의 그 다소곳한 표정으로 주변 엄마들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제가 진아 엄마랑 의논해볼게요. 요즘에 선생님한테 직접 용돈을 쥐어 주면 말이 많으니까...”

윤재 엄마는 진아 엄마를 향해 눈을 찡끗해 보였다. 진아 엄마가 제안한 의견이었지만 다른 엄마들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니 따로 이야기 하자는 듯도 싶었다. 모르긴 해도 진아 엄마와 의논해서 따로 챙겨드릴 생각인 것 같았다.

“요즘에는 그렇죠. 괜히 말 잘못 나오면 선생님들 힘들어지니까 조심해얄 거 같아요.”

괜한 문제에 끼어들지 않게 돼서 다행이라는 듯 상희 엄마가 활짝 웃었다.

반 아이들이 공통으로 입을 티셔츠는 아이들의 학급회의에서 결정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것은 현주였다. 윤재 엄마를 비롯한 다른 엄마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모임의 공식적인 안건은 모두 해결된 셈이었다. 때맞춰 들어온 직원은 쟁반에 후식을 담아왔다. 레몬 아이스크림이었다. 모처럼 말을 많이 했다는 듯, 엄마들은 혀끝에서 녹아나는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넋나간 듯 긁어먹었다.

“내가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겠는데, 다음 모임 날짜는 언제로 하죠?”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들며 진아 엄마가 말했다. 검은색 양장 수첩은 매우 평범하게 생겼지만, 금색으로 각인된 그림은 S대의 로고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수첩에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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