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온전히 책임지고 타인을 원망하지 않는 것은
3)
룸에는 세 명의 학부모가 앉아 있었다. 윤재 엄마와 부회장인 상희의 엄마 그리고 진아 엄마였다. 진아 엄마는 윤재 엄마와 함께 학교 운영위의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윤재 엄마가 연락한 학부모 중에 둘은 불참했는데, 직장을 다니는 엄마들이라고 했다. 오늘 참석한 사람들은 학부모 모임에서 한두 번쯤 마주친 적이 있었으므로 룸안은 제법 친근한 분위기였다.
“희연 엄마,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요?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물어온 사람은 상희 엄마였다.
“아, 아뇨.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요.”
현주가 대답했다.
“맞아. 햇빛이 좀 강렬하긴 하네요. 블라인드를 좀 내려달라 할까요?”
“아, 괜찮아요. 그래도 여기가 제일 꼭대기 층이라서 밖이 내려다보이니까 좋네요.”
현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유리는 소음을 차단하고 풍경만 남겼다. 소음이 제거된 대낮의 도시는 오브제로 남았고 그건 제법 그럴듯했다. 상희 엄마는 사람 좋게 웃었다. 상희는 학급에서 인기가 많은 학생이었다. 여학교였지만 상희의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성격도 좋아서 친구들에게 친절하고 배려심도 많다고, 현주의 딸 희연은 말하곤 했다. 상희에 관해 얘기할 때면, 희연의 말투에는 늘 냉소적인 기운이 섞여 있어서 현주의 신경을 예민하게 하곤 했다. 희연이는 대놓고 누군가를 질투하진 않았지만 부러운 대상이 나타나면 늘 그렇게 냉소적인 어투로 말하곤 했다. 스스로가 못났다는 자괴감을 피하고 누군가를 시기하는 촌스러운 짓도 거부하는 방법으로 희연은 냉소적 태도라는 수단을 찾은 듯했다. 현주는 그런 딸의 표현이 마땅치 않았지만 한편으론 자신을 지켜내려는 아이의 몸부림인 듯 보여 마음이 아리기도 했다. 누구에게든 타인과 비교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고, 그럴 때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희망이랄까 자신감 따위의 상실을 무참히 바라보곤 해야 한다는 걸 현주는 모르지 않았다. 청소년 시절에 현주는 그런 박탈감에서 벗어나려고 수없이 반항했고 자신을 학대했다. 스스로를 증오하다보면 견디기 힘든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는데, 현주는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대방을 원망하는 방법을 쓰곤 했다. 나약한 사람은 언제나 핑계거리를 찾는 법이었다. 부모를 원망하고 형제를, 친구를 탓하다보면 현주는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현주의 잘못만 아니면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까짓거 외로워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을 원망하고 탓할수록 현주의 성격은 더욱 강퍅하고 피폐해갔다. 청소년기가 지나고 대학생이 되어서야 현주는 스스로에게 책임지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꾸며내거나 억지로 주입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온전히 책임지고 타인을 원망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가능한 것이었다. 현주가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현주는 희연에게 그것에 관해 들려주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힘들겠지만 그건 오로지 희연의 몫이었다.
상희 엄마는 다소곳했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말수는 적은 편이었지만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이야기 속에 끼어들 줄 알았다. 아마도 상희가 엄마를 닮았겠구나, 현주는 생각했다.
노크 소리가 나더니 직원이 에피타이져를 가지고 들어왔다. 샐러드와 장국이었다.
“희연 엄마가 오기 전에 주문했어요. 스시 정식으로. 괜찮죠?”
윤재 엄마가 현주를 쳐다보며 나긋나긋하게 물어왔다.
“그럼요. 여기가 전망도 좋고 조용하고, 윤재 엄마가 장소를 잘 골랐네요.”
현주가 대답했다. 다른 엄마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윤재 엄마의 선택을 한껏 칭찬했다. 누구도 말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그날 모임을 주관한 윤재 엄마가 밥값을 내겠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화제는 주로 윤재 엄마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엄마들의 의견은 대부분 윤재 엄마의 입장에 맞춰졌다. 야채와 스시는 싱싱했고 상큼했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서서히 올라오는 포만감을 즐겼다. 만약 윤재 엄마가 중현이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날은 그렇고 그런 학부모 모임으로 현주의 기억에서 잊혀졌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