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형광등을 끄고 TV 화면에서 번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 속에 몸을 묻는다. 요즘 화제의 중심인 <흑백요리사 2>를 틀어놓고 멍하니 화면을 응시한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지금도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멋진 캐미를 보여주고 있는 샘킴과 정호영. 두 셰프가 연합팀이 되어 전쟁 같은 주방에 서 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미션에 성공했다. 심사위원들의 극찬이 쏟아졌고,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감싸 쥐며 환호했다. 뭐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수 있는 단 한자리에 오르는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으나, 쟁쟁한 셰프들 사이에서 생존후보로 호명되는 순간은 경연을 치렀던 두 셰프나 응원했던 나나 짜릿하고 달콤했다. 하지만 시선을 잡아끈 건 1차 생존이 확정되던 그 화려한 순간이 아니었다. 그보다 앞선 조리 과정, 정확히는 두 사람의 기묘한 역할 분담이 빚어낸 한 장면이었다.
이번 미션의 지휘봉은 정호영 셰프가 잡았다. 자연스레 샘킴 셰프는 그를 보좌하는 ‘수셰프’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요리라는 건 본래 겉보기보다 몇 배는 더 고단한 육체노동이다. 메인 셰프가 맛의 지도를 그리고 방향을 잡는 동안, 보조 셰프는 그 지도가 찢어지지 않도록 쉴 새 없이 재료를 다듬고, 설거지를 하고, 불 앞을 지켜야 한다.
화면 속 샘킴은 그야말로 동분서주했다. 소스를 끓이다가 민어를 잘게 썰고, 다시 채소를 썰고, 정호영이 필요로하는 도구를 대느라 이마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반면 정호영은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간을 보고 지시를 내린다. 그리고 이어진 중간 인터뷰. 해맑은 표정의 정호영이 카메라를 향해 말한다.
"요리를 할때 팀워크는 아주 잘 맞은것 같습니다."
그 뒤에 인터뷰를 이은 샘킴이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기가 막힌다는 듯 허허 웃는다. “어느 순간 일이 다 넘어오더라구요.”라는 허탈한 말과함께…
그 장면을 보며 낄낄대다 문득 등골이 서늘해진다. TV 속 그 장면이 마치 지난날 나를 고발하는 증거 영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살면서 꽤 자주 "우리는 팀워크가 참 좋다"라거나 "이번 프로젝트는 아주 매끄러웠어"라고 자평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매끄럽다'고 느꼈던 모든 순간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었다. 내가 팀장, 대표라는 이름으로 회의실 상석에 앉아 흡족해할 때, 막내 팀원은 복사기 앞에서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가족 여행이 평화롭고 즐거웠다고 회상할 때, 아내는 짐을 꾸리고 풀며 묵묵히 뒤치다꺼리를 감당했을 것이다.
성공이라는 결과에 취해, 나는 과정 속에 숨겨진 누군가의 헌신을 '좋은 팀워크'라는 말로 퉁치고 넘어갔던 건 아닐까. 내가 느낀 편안함은 내 능력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 몫의 불편함까지 떠안아준 덕분이었다. 정호영 셰프가 느낀 그 '좋은 합'이 사실은 샘킴 셰프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흔히 팀워크를 톱니바퀴가 딱딱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적인 조화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드는 팀워크는 기계가 아니라 유기체에 가깝다. 톱니바퀴가 마찰음 없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끈적한 윤활유가 필요하다. 스스로 닳아 없어지며 쇠와 쇠 사이의 열기를 식혀주는 그 헌신적인 액체 말이다.
진정한 팀워크는 모든 구성원이 1/n의 일을 똑같이 나눠 하는 산술적 평등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누군가가 기꺼이 더 무거운 짐을 지고, 누군가가 기꺼이 그림자가 되어주는 '아름다운 불균형'이다. 이번 미션에서 샘킴과 정호영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단순히 요리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한 사람은 믿고 맡겼고, 다른 한 사람은 불평 없이 그 믿음의 무게를 짊어졌기 때문이다.
승리는 달콤하지만, 그 승리를 만든 재료는 결코 달콤하지 않다. 맵고, 짜고, 때로는 비릿한 땀 냄새가 난다. 세상에 저절로 굴러가는 관계는 없다. 매끄러운 결과물 뒤에는 반드시 울퉁불퉁한 과정을 온몸으로 받아낸 누군가가 있다.
화면 속 두 사람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저 환호성 속에 묻힌, 분주히 칼질을 하고 믹서기를 누르던 샘킴의 땀에 젖은 등짝이 진짜 승리의 주역임을.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혹시 요즘 들어 만사가 순조롭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유독 편안하다고 느끼는가? "우리 팀은 문제없어", "우리 집은 화목해"라고 자신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잠시 멈추어 주위를 둘러보라.
당신의 그 평온함을 지켜주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샘킴처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지 모른다. 너무 당연해서 보이지 않았던 동료의 충혈된 눈, 아내의 거칠어진 손, 혹은 부모님의 굽은 등을 말이다.
우리가 누리는 안락함은 누군가의 분투가 지불한 대가다. 오늘 밤은 승리한 결과보다는, 그 승리를 위해 기꺼이 조연을 자처한 이들의 노고를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 당신 곁의 그 '숨은 영웅'에게, 팀워크가 좋다는 말 대신 "네 덕분에 가능했다"는 말을 건네야 할 밤이다.
"우리가 누리는 '완벽한 팀워크'라는 찬사 뒤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대신 짊어진 고단함의 무게가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