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ie Apr 30. 2021

2021년 4월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퇴사했다.

그렇다. 원하고 바라고 매일매일 간절했던 퇴사라는 꿈을 이루었다. 퇴사를 꿈꾼 이유는? 내 꿈을 되찾기 위해서. 그런데 막상 퇴사를 하고 보니 날 맞아주는 건 근육통. 긴장이 풀린 걸까? 그래도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낼 수가 없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본다.


회사를 다니는 중에 하루하루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적어 놓았었다.

- 평일 낮에 동네 구립 도서관 가서 하루 종일 책 읽기

- 프리랜서 플랫폼에 포트폴리오 올리고 승인받기

- 마음껏 그림 그리기

- 글 쓰고 싶을 때 글 쓰기

- 카메라 사서 스냅샷 찍기


매일 한 시간 이십 분 거리의 통근 거리를 오가며 지쳐서 침대에 쓰러지는 날들 가운데에서는 절대 이룰 수 없던 소소한 꿈들이 마음속에서 매일매일 꺼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퇴사만 하면, 퇴사만 하면...

수없이 되뇌었지만 막상 퇴사를 저지를 순 없었던 이유는 생계의 문제가 가장 컸다. 이직을 해야만 했지만 이직을 해도 하루 8시간을 어떤 공간에 규칙적으로 매어 있어야 하는 삶은 여기나 저기나 본질이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프리랜서를 꿈꿨다. 당장 3년 차 밖에 안된 웹 디자이너인 내가 대책도 없이 회사를 그만둬 버린다고 프리랜서 일자리가 구해질까? 게다가 중요한 것은 내가 프리랜서로 큰 돈을 벌고 승승장구하고 싶을 만큼 웹디자인에는 큰 욕심은 없었다는 것이다. 나에게 디자인은 직업이다. 내 삶 그 자체의 목적이 되는 일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웹디자인이라는 영역 그 옆의, 또는 그 너머의 어딘가에 있는 약간은 아득하고 내가 너무 오랜 길을 돌아와 희미해져 가는 그 어떤 것이었는데, 그건 내 삶을 이끌어가는 꿈이면서 내가 처음으로 오롯이 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가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었다. 그건 미술이라는 세계였다. 미술, 그 안에서도 그림의 세계는 내게 세상을 보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한낮에 작업실에서 보내고 싶어 했는지, 이른 오전 몸에 가득 충전된 에너지를 회사 앞 컴퓨터에서가 아닌 물감 냄새나는 공간에서 보내고 싶어 했는지. 내가 참아온 하루하루의  회사생활의 시간 동안 매일 같이 이 삶을 꿈꿔왔다. 작업실에서의 내 모습. 내가 하고 싶다기보다도 멀어질수록 왠지 모르게 불편하고 괴로운 감정이 드는 것. 생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그 느낌.


나는 지금 평일 오전에 작업실 책상에 앉아 있다. 빈 공간은 존재하나 아무도 오지 않으며 정원에는 나무에서 꽃 새순이 돋는 작업실에. 몸은 많이 지쳐 있는데 정신은 어떤 것이라도 시작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강릉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오전에 눈을 뜨면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집안일을 조금 하다가 작업실로 왔다. 아직까지 반쯤은 어안이 벙벙하다. 내가 정말 회사를 그만뒀다고? 노트북을 켜면 온갖 소비를 부추기는 배너들이 눈길을 끄는데, 이 와중에도 배너 디자인을 혼자 분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어떤 것을 그려야 하지 하는 고민이 앞선다. 어제는 버스를 타고서 내가 좋아하는 화방에 다녀왔다. 자주 쓰이는 색이지만 다 쓰고 없어져 버린 로우 엄버 유화물감을 사고, 졸업 전시를 준비할 때 사용했던 나무 패널보다 더 큰 사이즈의 캔버스 두 개를 사 왔다. 두께가 4센티미터 인 것과 2센티미터인 보통의 것. 로우 엄버로 엷게 밑 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야지.라고 생각하는데, 무엇을 어떤 이유로 그릴지에서 막혀버린다. 내가 그 색들을 왜 쓰고 싶어 하는지, 내가 그리려고 모아두는 레퍼런스들의 연관성은 무엇인지. 눈에 끌리고 마음에 끌리는 사진들을 폴더에 모으는 작업을 했는데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왠지 분명한 것은 내가 그림을 다시 시작하더라도 그 이유를 잘 모를 것 같다는 것이다.


이 모든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돈이다. 생계유지가 먼저다. 그래서 나는 이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기적과 같이 작업실과 거리가 가까운 병원에서 재택근무로 일을 하게 되었다. 난 이것을 사순시기의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병원일은 디자인이다. 그 몇 년 간의 회사에서의 시간이 헛되지만은 않은 것이, 어떤 요청이 들어와도 충분히 시간 내에 자신 있게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서두르지 말고 오랜 시간 고민하면서 일도 잘 해내야겠다. 실망시키고 싶진 않다.


디자인 재택 일과 그림, 그 밖에 하고 싶은 일들을 계획성 있게 하기 위하여 회사에서 쓰던 아사나 툴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개인 계정으로 예전에 가입을 해 둔 적이 있어서 오랜만에 접속한 후 채널을 생성했다. 채널명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 해야 하는 일들. 만들다 보니 벌써 채널이 7개가 되어버렸다. 그중에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과 병원일이다. 일이 없으면 생계와 재료값이 해결되지 않고, 그림은 내가 그 모든 것을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소속된 채로 한 공간에서 규칙적으로 일하는 것 자체가 나의 성향과 맞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지는 오래됐지만,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시도까지는 참 오래 걸렸다. 나 자신을 지칠 때까지 몰아세우기도 했고, 마지막 회사에서는 어찌 됐던 일 년을 채우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다. 노력이라는 게 별게 있다기 보단 매일매일 참는 것이었지.

나에게 주어진 너무나 소중한 순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아직 실감이 나지 않지만 시간과 건강과 정신을 잘 관리하여 뜻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도비 패키지 결제를 해 둔 것이 2021년 중반기를 지나기 전에 쓸모 있게 되어 다행이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꿈을 찾으러 가는 이 여정을 걷는 동안 지구의 어느 곳에서는 꿈은커녕 최소한의 인권을 되찾기 위해 생명을 바치고도 짓밟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코로나 19로 인해서 생계를 붙잡기 어려운 사람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내 삶의 이 기회는 거저 주어지지 않았으며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희생이 늘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고, 이기적으로 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먹고, 입고, 웃는 시간들에 누군가는 고통받고 있다는 우주의 모순을 잊지 말자. 이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으며 내가 하는 일들이 어떻게든지 인간의 그나마 남은 희망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헛될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구원하는 작은 일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