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생이라는 소모품을 매초, 매분, 매시간 사용하고 있다. 머지않아 금방 늙고 병들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자. 그렇다고 자서전에 등장하는 위인들처럼 순간순간을 치열하게 살자는 것은 아니다. 이게 가능하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공부만 하게? 그렇지 않다. 그저 지금 이 순간과 여기라는 장소를 느끼자.
나의 이데아를 설명하면서 심리학과 대학원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관심거리도 많다. 첫째로, 어느 날 문득 한국어 능력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나는 재외동포가 아니라 100% 토종 한국인이다). 영어 회화에 관심이 있던 나는, 영어를 10년 정도 독학했다. 외국인과 기본적이 대화는 가능한 수준이 됐지만, 생각보다 큰 재밋거리가 되진 않았다. 오히려 두 개의 언어를 할 수 있는 것보다 한국어 하나를 심도 있게 구사하는 것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다. 한국에서 가장 논리적인 글이라는 수능 비문학 기출문제집을 구매해 시간 구애 없이 지문을 읽었다. 둘째로, 수학과 물리 법칙을 공부하고 있다. 나는 항상 이 세상에 대한 이해에 목말라 있다. 수학은 우주의 언어이며, 물리는 흥미롭고 알아두면 실생활에 요긴하게 쓰인다고 생각한다. 셋째로, 피아노를 배워보려 한다. 음악은 정말 오묘하고 신비로운 것 같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연주를 통해 나타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늙을수록 눈물이 많아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배워두면 10년 뒤, 내 삶의 아주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위 내용들은 전부 내 직업과 전혀 연관이 없는 취미들이다. 어느 직장인이 쓸데없이 비문학 지문을 풀고 수학 공부를 하겠는가. 더군다나 나는 내 나이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낮은 편이다. 나보다 어린 후배들이 더욱 치열하게 승진을 준비하고, 자격증을 취득한다. 머지않아 나의 상사가 될 후배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나보다 나이 어린 상사도 한 트럭이다. 주위에서는 나를 안타깝게 보는 면도 없지 않다.
"능력은 좋은데.. 자네도 승진 준비를 좀 해보지 그런가.." 직속 상사가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승진을 준비할 시간에 책을 더 읽고,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에 훨씬 큰 행복을 느낀다.
그렇다고 내가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나보다 어린 상사를 대할 때, 내 중심을 꽉 잡지 않으면 정신력이 흔들릴 때도 있다. 나도 느끼고 있다. 승진을 해서 나쁠 게 없다. 하지만 온몸이 요동치는 것을 어떡하겠는가.
'책 읽자! 벌써 설레는 걸?'
'비문학 보자! 이번엔 어떤 지문이 있을까?'
'수학 법칙을 이해하고 싶어! 이 세상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분이야!'
'오늘 많이 힘들었지? 내 심정을 음악소리로 표현하고 싶어!'
이제 나는, 내 이데아를 거부할 수 없는 몸이 돼버린 듯하다. 좀처럼 무시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너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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