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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놀이 Aug 02. 2024

용기의 미학

  이데아를 따르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그럴 수밖에 없겠다. 우리 각자의 이데아는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열린 마음으로 용납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잘 산다'라는 것을 정형화된 패턴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공부를 잘하고, 취업이 잘 되는 대학교를 가고, 높은 연봉을 받는 직장을 구하고, 집안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기에 건강한 아기를 낳고, 아이도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고, 노후 준비도 남부럽지 않아야 하는 등.. 물론 누군가에겐 이 패턴 자체가 이데아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생을 두 번 사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공평하게 딱 한 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인생이 본경기이자 실전이란 말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이데아를 찾아 떠난다는 건 쉽지만은 않다. 나 같은 경우처럼 사회적으로 인정을 덜 받을 수 있고, 승진이 느릴 수 있고, 봉급을 덜 받을 수도 있다(혹시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봐 덧붙이자면, 나는 금방 그만 둘 회사에 다니면서 이런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직장에서 평생 근무할 생각이다). 나라고 이런 환경이 전혀 개의치 않은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파훼법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다. 사회가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내가 나를 인정하면 되고, 승진을 빨리 해도 윗사람은 언제나 있고, 봉급이 적으면 버는 만큼 맞춰 살면 된다.


  어렵게 이데아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손 치더라도, 다음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괜히 이데아니 뭐니 찾으러 떠났다가, 나 자신도 못 찾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못 받으면 어떡하지?' 이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말해주고 싶다. 첫째, 이 세상에 위험부담이 없는 선택이란 없다. 애초에 위험부담이 없는 일들은 모든 사람들이 고민 없이 선택을 하며 살고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차피 언젠가는 선택의 기로에 반드시 서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이데아를 찾는 일만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둘째,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인생을 살면서 선택의 순간에, 독자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한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예를 들자면 무궁무진하다. 어떤 공부 방식을 선택할 것인지, 어떤 학과에 진학할 것인지, 회사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혼식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등 남의 말만 듣고 따르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고 미안하지 않은가. 내 삶에 내가 주체가 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물론 일반적인 선택을 뒤로하고, 미숙한 나의 판단력을 인해 내 선택이 실패할 수도 있다. 내 선택이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 합리화와 이데아를 찾는 과정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냥 '내 선택이니까 후회는 없어'하고 쉽게 넘겨선 안된다. 어떤 점이 잘못됐는지, 앞으론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시행착오를 쌓아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우려했던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찾지도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후회하고, 스스로 고쳐나가자. 내 선택이 틀려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뭐 어떤가. 후회도 하나의 아름다운 감정 중에 하나다. 처음에는 잘하는 것보다 용기를 내고, 시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나를 찾아가자.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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