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벌레 순대’ 영상 때문에 많이들 놀라셨죠. 저는 그 소식을 집 주변 유명 순대집에서 모둠 순대를 먹다가 들었습니다. 지인 얘길 듣고 동영상을 바로 확인했습니다. 기겁했지요.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순간 고민했습니다. 조용히 그냥 일어날까. 아니면 소리 없이 그냥 먹을까. 아니면 카운터에 앉아 계산중인 주인장에게 가서 물어볼까. (혹시 순대 어디 제품쓰세요. 혹시 진성순대 쓰는 거 아닌가요). 고민했습니다. 0.5초? 아니 1초? 정확히 말하면 젓가락 질 한번 할 동안 결정했습니다. 조용히 먹자. 쫌생이 주제에 무슨... 결국 시켜놓은 모둠순대에 야채 순대까지 더 시켜서 다 먹고 나왔습니다. 궁금증은 뒤로 한 채.
다 아시겠지만 보도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지난 2일 KBS 9 뉴스가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충북 음성에 있는 순대 제조업체 진성푸드 공장내 위생 상황은 참혹했습니다. 지난 2월에 내부 직원이 촬영했다는 동영상에는 천정에서 물이 떨어져 음식물에 섞이는 장면, 순대 찜기 바닥에 벌레가 우글거리는 장면, 냉동 식재료가 공장 바닥에서 해동되고 있는 장면, 이미 만들어진 제품이 다시 섞여 갈리는 장면 등이 나옵니다. (더 언급하기가 거북하네요.ㅠ)
https://www.youtube.com/watch?v=SQrBlQwjABg
진성푸드는 1997년 부광식품으로 시작해 30년 가까이 순대만 만들어 온 순대 전문 제조업체입니다. 2013년 회사명을 지금 이름으로 바꿨고, 직원 200여 명에 매출 400억 원쯤 하는 꽤 알려진 중견 기업입니다. 물론 '식품 위생안전에 관한 해썹(HACCP) 인증'도 받았습니다. 해썹 인증은 식품 제조업체에겐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 해썹이 얼마나 까다로운 지는 식품업체에서 일해 봤거나, 주위에 식품업체에 근무한 분이 있으면 잘 알 겁니다. 인증받기도 힘들고 유지하기 힘듭니다. 식약처에서 떴다 하면 다들 초긴장. 닦고 조이고 물청소하고 난리입니다. 그런 인증을 받은 업체가 왜 그 모양이었는지, 그동안 식약처는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충격적인 위생상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더 충격적이었던 것(제가 사과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관계로) 은 사후 회사의 대응입니다. 화가 나다 못해 슬프기까지 한 '상식 이하' 대응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흥분하냐고요. 설명드리겠습니다.
지난 2일 KBS 보도가 나가자마자 해당 업체는 홈페이지에 이런 안내문을 게재합니다. '사과문'이 아닙니다. '안내문'입니다.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1. KBS 보도 내용은 편파적인 편집과 터무니없는 억측에 근거한 것이다. 전 직원의 앙심을 품은 악의적 제보를 했다. 방송금지 가처분 소송을 냈으나 졌다. 그래서 나오게 됐다. 심려 끼쳐드려 사과드린다.
2. 천정에서 물이 샌 것은 지난 2월의 일이고 당시에 다 수리했다. 물이 섞인 재료는 모두 폐기 처분했다. 바닥에 틈이 벌어져 벌레가 있는 것도 이미 다 조치했다. 유통기한이 다 된 제품을 재활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3.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기초로 사회적 평판을 떨어뜨리는 보도 행태에 대해 반론보도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제보자에 대해 형사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내용이 매우 고압적입니다. 협박조입니다. 악의적 제보이고 악마적 편집이기 때문에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합니다.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는데, 그 이유가 그런 방송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방송이 안나오게 해야 하는데 막지 못해서 사과드린다는 겁니다. 그런 방송 내용으로 놀랐을 소비자들, 그런 제품을 먹었을 지도 모르는 소비자들에 대해 미안해한다거나 사죄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물론 해당 업체 입장에서는 과거 그런 일이 있었지만 이미 조치를 취한 상태이고, 그런 동영상에 나가게 된 배경도 전직 직원의 앙심에 의한 것이기에 억울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위생적인 상황이 극히 이례적인 상황이었는지, 아니면 관행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보 내용에 따르면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회사는 사과 없이 법적 대응만 고집합니다.
해당 업체의 이런 자세는 불과 이틀 뒤 180도 바뀌게 됩니다. 식약처가 뒤늦게 이틀간 현장 조사를 실시해 비위생적인 생산환경과 재료 표시 위반 혐의 등을 확인한 후 전 생산제품에 대해 판매 중단 및 회수 조치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보도 뒤 거래업체들도 연달아 계약해지를 통보했습니다.
그래서인지 2차 사과문은 ‘덮어놓고 읍소’입니다. 오너인 박진덕 회장은 "부끄럽고 참담한 심정으로 사죄드린다" "과거 퇴사당한 직원이 앙심을 품고 악의적인 제보를 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변명의 여지없는 나의 잘못" "무릎 꿇고 이해와 용서를 구한다" "인생을 걸고 만든 순대의 신용에 사형이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다" "고객과 소비자의 신뢰와 믿음을 되찾겠다"며 납작 엎드립니다.
그러면서도 누구한테 사과를 하는 것인지, 뭘 잘못했다는 건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것인지,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은 뭔지 등은 모호합니다. 사과는 하는데 뭘 사과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더 어이없고 황당한 것은 그 와중에 회장이 뜬금없이 자신의 인생역정을 토로하는 대목입니다. 그는 사과문의 절반 이상을 이런 내용으로 채웁니다.
1. 가난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맨손으로 200여 명의 대가족(직원)을 거느린 400억 매출 순대 회사를 만들었다. 순대는 제게 학교이고, 공부이고, 생명이고, 생명의 모든 것이었다.
2. KBS 보도는 제게 날벼락이었다.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으나 거부됐다. 거래를 끊는다는 전화가 빗발쳤다.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죽고 싶었다.
3. 그 순간 220명의 직원들 얼굴이 떠올랐다. 억울하지만 낙담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순대는 희망이다. 다시 일어서겠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요? 그렇게 어렵게 일군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는 건가요? 하이라이트는 맨 마지막입니다. 박 회장은 느닷없이 “K순대 세계화를 개척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라고 말합니다. 비위생적 생산 문제로 기업이 존폐의 기로, 벼랑 끝에 섰는데 뜬금없는 K순대 세계화 비전입니다. 이 역시 어쩌라는 건지요. 대충 이쯤에서 묻어두고, 수출 잘하게 밀어 달라는 말씀인가요.
반응은 예상한 대로입니다. 현재 진성과 거래 중인 업체들 뿐 아니라 과거 거래했던 업체들까지 모두 나서서 손절하고 있습니다. 진성과는 거래를 진즉 끊었다, 우리는 아무 관계없다고 열심히 해명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쩌다 회장의 말대로 사형선고를 받는 상황까지 갔을까요. 모르지만 회사가 처음부터 저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느 순간 나사가 풀리고, 위생 환경도 느슨해졌겠지요. 그 계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가정을 해봅니다. 진성이 처음 언론사 접촉을 받았을 때, 아니 그전 전직 직원의 접촉을 받았을 때 진정성 있는 자세로 대화를 시도하고 시정 조치를 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니 늦었지만 첫 보도가 나갔을 때라도 협박조가 아니라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세로 반성하고, 피해 구제와 재발방지를 약속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꼭 저런 식으로 대응해야 했을까요.
진성푸드의 사과문은 한국인들의 커뮤니케이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한국인들은 아직도 쌍방 커뮤니케이션, 즉 대화와 협상, 사과와 용서, 조율과 화해 등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런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일방적이고, 갈등적이고, 극단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의존합니다. 그에 따른 기회비용이 엄청납니다. 일이 나고 나서 후회하면 늦습니다. 사과와 용서, 조율과 화해 등은 힘들여서 공부하고 익혀야 할 커뮤니케이션 스킬입니다.
진성푸드의 분노 유발 대응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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