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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끌 Mar 03. 2020

공지영 <먼 바다>... 첫사랑 (2)

'책끌(책에 끌리다)' 서평 #16

대학에서 독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미호도 어느새 6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이혼하고 혼자 키워 온 딸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서 살고 있는 여동생과 어미니를 방문하기 위해 뉴욕에 갈 계획을 세운다.  


미호는 재직 중인 대학의 영문과 선생들이 마이애미로 동행하게 된다. 그 선생들이 헤밍웨이 심포지엄에 가는 길에 문학기행을 계획한 모양인데 결원이 생겼다며 같이 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미호는 마이애미와 키웨스트까지만 동행하기로 하고 또 다른 계획을 세운다. 최근에 알게 된 자신의 첫사랑이 뉴욕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다. 

공지영 작가 <먼 바다>



만난다면 40년 만이었다. 뉴욕에 처음 가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도 그리고 가면서 

꼭 그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대답을 해왔다.


- 11페이지



여고시절, 미호는 성당에 봉사를 나왔던 신학생 요셉과 애틋한 감정을 키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도망치듯 달아나게 된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그 시절에 그와 먼바다에 나갔었는지, 그가 자신에게 하려고 했던 말은 무슨 뜻이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이번에 그를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볼 생각이다.


40년의 세월은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이 광야에서 헤맸다는 시간과 같다. 옛 이집트에서 살면서 몸에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데 필요한 세월이 40년이었다고 한다. 4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이집트에서 얻은 이교도의 습관들이 그들에게서 지워져 새 땅을 찾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호는 40년이 지나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것들도 분명히 있다고 믿고 살아왔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40년 전에 그와 만났던 칸막이가 높았던 레스토랑의 이미지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맥주의 크림빛 거품들까지도. 요셉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가 자신과 함께 먼바다를 헤엄쳐 나간 적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기억이 맞다고 믿는다.



40년은 망각의 시간이리라. 되돌리지 못하는 시간.

그러나 40년이 지나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것들도 분명히 있었다.


- 18페이지



<먼 바다>를 읽다가 중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던 피천득의 <인연>의 한 구절을 다시 보게 됐을 때 반가웠다. 그때도 주인공이 아사코와 인연을 맺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아사코를 세 번째 만났을 때 주인공은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말했다. 그가 기억하는 아사코의 모습과 그가 꿈꿔왔던 아사코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지 않을까.


요셉은 그녀와 만나지 않았다면 신부가 되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1980년대 엄혹했던 정권의 폭압과 탄압에 가슴 아파했고,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신부로써 살아갈 삶의 동력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니 신부가 됐을 것 같지 않았다. 


뉴욕 맨해튼의 자연사박물관 앞에서 다시 만난 미호를 그는 너무 보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미호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만나지 말 것 그랬다는 생각도 한다. <인연>의 주인공이 아사코를 세 번째 봤을 때처럼.



그녀가 눈을 들자 눈앞의 거대한 벽 하나에 

온통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버질이라고도 불리는 사람의 시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그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 167 ~ 168페이지



미호는 그와 그의 여동생을 만나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그동안 자신이 몰랐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40년 동안 잊고 살았던 기억의 퍼즐이 이제서야 맞춰졌음을 깨닫는다. 그와 함께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가 말하려고 했던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미워했던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다.


40년이란 시간이 길다면 길고, 길지 않다면 아닐 수도 있다. 작년 3월이 엊그제 같다. 사춘기를 겪었던 중고등학교 때도 바로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먼 바다>를 읽다 보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기억들 중에 한 조각의 생각에 마음이 머문다.


첫사랑이라고 부르기도 쑥스러웠던 스무 살 시절, 스르르 눈이 감기고 빛바랜 기억 속의 필름이 서서히 돌아간다. 그때의 그녀가 먼저 만나자는 연락을 해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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