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나아지는 시간, 슬로우 카레 레시피

시시콜콜한 집밥이야기_5

by 알파카

무한도전의 모 특집에 장항준 감독과 김은희 작가 부부가 출연한 적이 있다. 어떤 맥락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내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이냐는 무도 멤버의 질문에 대한 장항준 감독의 대답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그는, 오늘의 아내는 어제의 아내보다 단 0.0001%라도 나은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여느 부부와 같이 서로를 구박하고 놀리기도 하다가 농담 반 진담 반 가벼이 오가는 질문 가운데 나온 말이었지만 참 듣기 좋았다. 어제보다 티끌만큼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는 아내, 그리고 아내의 그 티끌만 한 성장을 알아봐 주는 남편. 그보다 더 좋은 부부, 서로에게 더 좋은 사람이 있을까.


나는 나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결혼 후 살아온 2년 동안 난 조금 더 나아졌을까 그대로일까, 아니면 심지어 예전보다 못한 사람이 되었을까. 나에 대한 남편의 평가는 늘 후한 편이어서 객관적인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큰 다툼 없이 2년간 알콩달콩 살아온 것을 보면 적어도 우리 둘 사이가 이전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았고, 더듬더듬 서로에게 맞춰가는 생활 습관들도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신혼 초부터 해와 이제 조금은 수월하게 해 나가는 집안일이나 처음에는 놀랐지만 익숙해진 서로의 잠버릇, 그리고 끓이고 또 끓여 이젠 제법 맛을 낼 줄 아는 카레 같은 것처럼.


맛의 차이를 크게 느끼기 쉽지 않은 음식 중에 하나가 카레인 것 같다. 전문점의 카레, 인도 커리 등이 아닌 흔히 집에서 카레가루로 만드는 평범한 카레 말이다. 자체의 향이 워낙 강하기에 뭘 넣어도 다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니까. 그래서 신혼 초에는 누구나 만드는 가장 흔한 방법으로 카레를 만들었다. 돼지고기와 야채를 볶고 물을 붓고 카레가루를 풀어서 끓이는 방식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있어서 나는 여기서 뭘 더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무려 1시간 넘게 걸리는 슬로우 카레 레시피를 만났다. 3분 만에 뚝딱인 카레도 있는데 1시간이라니? 무슨 수고를 어떻게 들이면 카레를 1시간이나 끓일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만든 카레는 정말 그만큼 맛있을까? 궁금한 내 머릿속을 미리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레시피의 주인은 자신의 레시피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시간은 걸리지만 무진장 맛있다!! 사실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푹 끓이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갖은 야채들이 다 뭉그러져 카레 속으로 사라질 거라는 대목이 참으로 솔깃했다.


그렇게 도전한 슬로우 카레. 시작은 길게 썬 양파를 버터에 달달달 볶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충 양파가 익을 때까지만 볶는 것이 아니라, 양파가 갈색으로 변해 단맛을 뿜어낼 때까지 끈기 있게 20분가량 볶아주는 것이다. 다 볶은 양파에 고기와 미리 썰어둔 야채들을 함께 볶는다. 야채가 다 볶아지면 이제 물을 넣고 끓여야 하는데, 여기서 그냥 물이 아니라 토마토를 사용한다. 한번 살짝 데쳐서 껍질을 깐 토마토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뒤 냄비 뚜껑을 닫고 중간 불에서 20분가량 끓이다 뚜껑을 열어보면 토마토와 야채의 즙이 함께 어우러져 바글바글 끓고 있다. 이제 카레가루를 넣어 저으며 약간의 물이나 여분의 토마토로 농도를 맞춰준다. 카레가 잘 풀어질 때까지 저은 후, 다시 뚜껑을 닫고 20분 정도 약한 불에서 끓이면서 눋지 않게 중간중간 저어주면 된다.


단순히 볶고 끓이는 시간이 1시간이지 사실 자잘한 재료 준비까지 하면 1시간 반에서 두어 시간가량 소요되는 꽤 긴 시간이 걸리는 레시피다. 그럼에도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맛을 봤는데, 맛있다!! 양파를 잘 볶는 것, 물 대신 토마토를 넣는 것, 약한 불에 오래 끓여주는 것, 이 세 가지 요소가 이토록 카레의 맛을 업그레이드시켜 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날의 경험을 계기로 나는 다양한 재료를 넣은 카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토마토를 덜 넣기도 하고, 우유를 넣어보기도 하고, 돼지고기가 아닌 소시지나 양고기를 넣기도 했다. 약간의 재료를 변화시키면 카레는 의외로 아주 다른 맛을 냈고 그때마다 내 카레는 매번 조금씩 발전해 갔다. 그렇게 몇 솥의 카레를 끓이고 드디어 내 나름의 가장 맛있는 카레의 조합을 완성하게 되었는데, 바로 고기 대신 비엔나소시지를 넣고 닭고기 육수와 아주 약간의 토마토, 그리고 잘게 썬 양배추를 넣어 카레의 농도를 맞추는 것이다. 그간 우유나 야채를 넣어 끓인 채수, 버섯 육수 등을 써 보았지만 닭고기 육수의 진한 감칠맛이 어우러진 카레는 밖에서 먹는 어떤 카레보다도 더 깊은 맛을 낸다.


오래오래 끓인 카레 안에는 양파와 양배추들이 원래의 모양을 거의 잃고 몽글몽글 함께 섞여 있어 부드럽게 넘어간다. 웬만해서 내 요리를 다 맛있다고 해 주는 남편이긴 하지만, 그날의 카레를 먹은 남편은 평생 먹은 카레 중에 최고라고 날 치켜세워줬다. 그리고 된장찌개와 카레만큼은 어머님보다 내가 만든 것이 훨씬 훨씬 맛있다고 말해 나를 무척 기쁘게 했다. 2년의 시간 동안 나 스스로 발전시킨 것이 오직 카레뿐만은 아니겠지만, 큰 솥에 한가득 끓인 카레를 싹싹 긁어 그릇에 담는 남편을 보면 카레 맛있게 끓일 줄 아는 와이프가 된 것이 세상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또 무엇이든 조금씩 어제보다 더 나아지면 되겠지,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살아갈 날은 많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도록 응원하는 누군가가 옆에 있고, 나 또한 그에게 그런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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