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아이가 아침에 크게 혼나고 갔거든요. 선생님이 잘 살펴주세요"
"오늘 끝나고 방과후 보충이 있는데 아이에게 전달 좀 해주세요"
"숙제할 것을 교실에 두고 왔다고 하네요."
"알림장 쓰는 데 손이 아프다고 하네요."
저학년 교실에서 심심치 않게 마주하는 요청들입니다. 카톡 활용이 일상화되어서 일까요. 하0클래스, 클래스0 등 학급 소통 플랫폼을 통해 수업 중 실시간으로 날아듭니다. 이은경 작가의 <80년대생 학부모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요즘 학부모(특히 80년대생)가 학교의 역할로 ‘성적 향상’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이의 성적은 사교육 등 아이에게 맞는 다양한 방법으로 채워준다는 거죠. 학교에는 사회성 등 다른 것을 바라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 아이 공부는 잘 따라가나요? 때려서라도 잘 가르쳐주세요"는 흑백영화 대사처럼 아득히 멀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수업에 대해서도 조금 가벼운 생각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수업 중 교실에 비치된 전화벨이 울리거나 메시지를 "띵똥" 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 내용도 이전과는 다르죠. 학습적인 부분이 아닌 아이 맞춤형으로 불편한 점을 해소시켜주어야 하는 요청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나, 교육 아닌 '보육' 미션이 접수될 때, 당혹스러움과 함께 씁쓸한 뒷맛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쓴맛은 학교 교육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변한 것이 불편해서가 아닙니다. 아이가 자기주도성을 기를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더불어 부모의 세심한 배려가 나노 단위로 느껴질 때, 관심과 애정의 부작용이 염려됩니다. 성인 이후 자립의 씨앗은 지금, 바로 초등 저학년까지의 자기주도생활을 통해 단단히 뿌리내립니다. 그런데 뿌리내리고 있는 씨앗이 조그만 유리 온실 속에 있었다면요. 가끔 물이 며칠간 없는 것도,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날아갈 듯한 상황도 마주하지 못했을 겁니다. 유리 온실을 벗길 때마다 휘청 하는 모습에 성급히 다시 덮게 되는 상황이 계속될지도 모릅니다. 새싹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유리 온실 너머로 크고 튼튼하게 뻗어나가야 하는데 말이죠. 아이는 좋은 '결핍'에서 튼튼하게 뿌리를 내립니다.
결핍을 생각하면 희비극 가면(The mask of comedy and tragedy)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희극, 다른 하나는 비극을 상징하는 웃고 울고 있는 얼굴의 가면으로 그리스 연극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결핍도 좋은 결핍과 나쁜 결핍이 있습니다. 영양, 애정, 학습, 경제적 결핍 등은 아이에게 흉터를 남기는 나쁜 결핍입니다. 좋은 결핍은 아이의 기본적인 욕구(식욕, 수면욕 등)를 해치지 않으며 애정과 신뢰, 소통을 바탕으로 합니다. 아이가 힘들지만 무거운 가방을 메고 등하교를 해보는 것, 부끄럽지만 선생님께 자신이 필요한 것을 부탁드릴 수 있는 것, 숙제를 못했으면 학교에서 꾸중 들어 보는 것, 준비물이 챙겨지지 않아 불편함을 겪어보는 것, 친구와의 다툼을 스스로 해결해 보는 것이 좋은 결핍입니다. 이렇게 아이가 난처한 상황에서 물리적, 정서적 결핍을 극복해 내는 과정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교육이며 성장입니다. 지금 시대에는 좋은 결핍의 반대가 나쁜 결핍이 아닌 '과유불급'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유불급은 유교 경전인 <논어>에서 언급됩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이죠. 자녀 양육에서 좋은 결핍에 노출되지 못하고 과유불급의 유리 온실에 덮여 있는 아이들은 자립의 기회를 잃게 됩니다.
아이들에게는 어떤 결핍을 주어야 할까요? 저는 '아이들에게 결핍을 줘야지'라고 마음먹는 것 자체가 반은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좋은 결핍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손을 거두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결핍의 시작은 부모의 '느린 반응'입니다. "엄마, 이거 해주세요"라는 요청에 0.2초의 초스피드 답을 하기 전에 "우선 네가 해보자" "어떤 건데? 이건 네가 할 수 있겠는데" 하며 아이가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됩니다. 아이의 불편함이나 요청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면 생각보다 부모의 도움 없이 아이가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뚜껑 돌려 따기, 입을 옷 꺼내기 등 사소한 요청에는 완곡한 거절이 보약입니다. 간혹 부모의 거절이 아이의 상처로 남을까 염려하는 분을 보게 됩니다. 부모가 응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며, 노력으로 되지 않을 때 언제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아이는 상처받지 않습니다. 한 번의 거절과 자기주도적 극복을 연산 문제집 한 장 푼 것과 같다고 생각해보세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가 값지답니다.
다음으로 결정의 결핍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 35,000회의 결정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옷을 입을지, 다음 숟갈에는 반찬을 무얼 먹을지까지도 선택하게 되죠. 아이들이 자기주도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결정의 결핍을 주어 아이가 스스로를 위해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어야 합니다. 결정은 메타인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메타인지를 기르는 기본은 자신이 선택해 보고 시행착오를 겪어나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 맞는 결정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일상의 사소한 결정부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까지 결정의 결핍을 주어 아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성인이 되어 "엄마! 직장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나 어떻게 할까? 말을 할까 말까?" 하는 전화를 받고 싶은 부모는 없습니다.(최근 웃픈 사연으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결정의 결핍으로 아이는 성인이 되어가며 완성도 높은 35,000개의 결정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위기관리의 결핍이 필요합니다. 이 부분은 특별히 부모와의 세심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아이가 위기 혹은 갈등 상황에 직면했을 때 부모는 직접 해결해 주기보다 위기관리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코칭해야 합니다. "선생님! 저희 아이가 학교에서 아무랑도 놀지 않는다고 말하는데요.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에게 살짝 말해서 저희 아이와 놀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실제로 초등학교 고학년 담임 선생님이 받은 요청입니다. 선생님이라 해도 분위기는 형성해 줄 수 있지만 관계를 만들어줄 수는 없죠. 학교폭력 등 아이가 스스로 해결해나가지 못하는 중대한 사안은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갈등을 어른들이 해결해 준다면 그 아이는 다양하게 마주하는 위기 상황에서 대처하기 어렵게 됩니다. 친구가 물건을 빌려주었는데 망가뜨렸거나 별명을 불러 기분이 나빴던 상황 등 어디서나 겪을 수 있는 갈등 상황에서는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고 다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황을 자세히 들어보고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상의하는 것까지가 부모의 역할입니다. 대화로 공감과 조언을 전하돼 대처해 나가는 것은 아이의 몫으로 남겨주세요.
“요즘 아이들은 결핍이 없어요. 아이들에게는 게임 시간 정도가 결핍입니다.” 얼마 전 조선미 박사님은 인터뷰 중 아이들에게 제공할 적절한 보상이 없는 것을 문제점으로 꼽았습니다. 규칙을 만드는 과정에서 적절한 보상이 필요한데 아이들이 부족한 것이 없으니 만족할 만한 보상을 주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간식, 장난감, 책 등 절실히 원하지 않아도 쉽게 얻을 수 있으니, 아이들에게 결핍된 것은 고작 미디어 활용 시간 정도라는 것이죠. 결핍의 부재는 생각보다 심각한 결과를 낳습니다. 캥거루족과 은둔 청년이 증가하는 것이 화두에 오르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결혼은 둘째고 독립이라도 빨리 하면 효도라고 합니다. 좋은 결핍으로 자기주도생활이라는 씨앗을 심어 단단하게 뿌리내린 아이들로 성장하길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