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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면 날씬해질 줄 알았어

힘든데 왜 살은 안 빠지는 거야!

by 원정미

여행을 싫어하지만 어쨌든 함께 가기로 한 이상 여행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건강이었다.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하는 나는 운동도 끔찍이 싫어한다. 정규교육 12년을 졸업할 때 가장 기뻤던 것은 아무도 이제 나에게 뛰어라. 엎드려라. 매달려라 할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하기 싫은 체육이 이제 내 삶이서 사라진 것이 가장 행복했을 정도로 나는 움직이는 것을 싫어한다.


거기다 몇 년 전부터 목 주변에 만성습진 같은 피부병이 생겼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땀이 나면 즉각 재발했다. 그것 때문에 땀을 흘리면 목이 간지러워지고 심할 땐 피가 날 때까지 긁었다. 이 피부병 때문에 기르던 머리카락까지 쇼트커트로 잘라야 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땀을 흘리는 운동은 더더욱 피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많이 먹지 않아도 저절로 나잇살이 쪘고 한번 찐 살은 죽어라 빠지지 않았다. 솔직히 그다지 살을 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중년의 나이에 너무 날씬한 건 비인간적인 것 아닌가. 남편이 나의 건강을 걱정할 때마다 “ 이제 곧 여행 가면 열심히 돌아다니고 하이킹도 하고 할 테니까 걱정 마. “라고 안심을 시켰다.


진짜 나는 여행을 하다 보면 살이 좀 빠질 줄 알았다. 직장 다닐 때 말고는 일주일에 한 번 외출도 잘 안 하던 사람이라 매일 가방 메고 많이 걸어 다니고 오르막 내리막 등산도 하면서 땀 흘리면 몸무게는 저절로 줄어들 줄 알았다. 몸은 지쳐서 침대 위로 쓰러지면 바로 잠들 것 같이 힘들어도 그거랑 다이어트는 다른 거였다.


몸은 이렇게 힘든데 왜 살이 안 빠질까? 일단 식사시간이 불규칙해졌다. 집에 있을 땐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아침을 먹고 남편은 직장으로 아이들은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저녁에 다들 집으로 돌아오면 우린 늘 5~6시 사이에 저녁을 먹었다. 그리곤 야식 같은 거 없이 다음날 아침을 먹었다.


하지만 여행이 시작되자마자 모든 규칙은 무너졌다. 도로 위를 달리다 보면 늘 예상보다 늦게 출발하고 교통체증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점심은 늘 2-3시가 되어야 먹기도 하고 아님 점심도 저녁도 아닌 4-5시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늦어진 점심은 늦은 저녁을 동반했다. 예전의 루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불규칙함에도 불구하고 삼시 세끼를 꼬박 먹는 것도 문제였다. 예전엔 남편과 아이들이 각각 출근하고 학교를 가면 점심은 건너뛰거나 사과나 바나나가 다였다. 하지만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한 남편과 아이들과 매일 함께 있다 보니 삼시세끼 꼬박꼬박 차려야 했고 나도 늘 한 숟가락씩 거들다 보니 전보다 오히려 식사량은 많아졌다.


솔직히 이런 이유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당분섭취이다. 아무리 하이킹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 다녀도, 손에는 늘 시원하고 달달한 온갖 음료가 들려있었다. 어떤 날은 아이스 바닐라 라테, 어떤 날은 얼음 가득 찬 콜라, 또 다른 날은 새콤달콤 레모네이드. 날이 더우면 더울수록 몸이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를 유혹하는 달콤한 간식은 지천에 널려있었고 지친 몸뚱이는 번번이 유혹에 넘어갔다. 이런 상태라면 살이 빠지기는커녕 더 통통해 질게 뻔했다. 다이어트는 뭘 하는가 보다 하지 말아야 할걸 안 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 살이 빠지지 않은 것에 크게 불만은 없다. 왜냐면 나를 오래도록 괴롭히던 피부병이 사라졌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말이다. 지금 여행 다니는 엘레이와 샌디에이고 쪽은 유난히 습도가 높고 더운 곳이라 만약 피부병이 여전히 있었다면 다니는 내내 나를 괴롭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여행 내내 짜증과 괴로움을 호소했을 것이고 아마 여행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날이 후덥지근해지거나 아니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김없이 재발하던 피부병이었다. 그렇게 도진 병은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 나를 괴롭혔다. 잘 먹고 잘 자고 날이 선선해지면 잠잠해지다 여름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 세월이 한 8-9년이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 아무리 땀을 뻘뻘 흘려도 다시 재발하지 않고 있다.


남편은 “네가 하도 햇빛을 안 봐서 그랬던 거야. 지금은 거의 매일매일 햇빛을 봐서 좋아진 거야. 다 나 덕분이야~ 고맙지?”라며 얄미운 소리를 한다. 그의 생색이 어이없기도 하지만 속으론 ‘그런가?‘ 싶기도 하다. 무슨 짓을 해도 낫지 않던 병이 나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여행을 떠나면서 직장도 그만두고 골치 아팠던 인간관계도 떠나고 잘 먹고 잘 자고 적당히 햇빛보고 많이 걸었던 게 내 몸의 면역을 더 튼튼하게 해 준 것 같다.


여행한다고 살이 저절로 빠지지 않았다. 뭐든 나에게 진짜 좋은 것은 저절도 되는 법이 없다는 걸 배웠다. 공부를 잘하는 것, 새로운 언어를 배우거나 악기를 배우는 것과 같이 날씬해지는 것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냥 나는 건강한 돼지가 되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의 고질병이 치료되었으니 여행이 나에게 잘 맞나보다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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