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장서사

나는 오늘 마음을 눌러놓았다

21.11.29

by 치슬로

첫 출근을 했다.

대기업이란 원래 이런 것일까?

정신을 쏙 빼놓는 온갖 온보딩 교육과 절차가 끝나고 나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속물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에게 필요했던 건 이런 타이틀과 체계, 사원증을 찍을 때 잠시나마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정신이 없다 보니까 마음도 아프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거리에 무작정 흩날릴 종이 한 장에 무거운 돌을 괴어 놓은 느낌. 하지만 퇴근길 지하철에 탄 순간부터 다시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뷔시는 자신이 연인과 가장 행복할 때에 <기쁨의 섬> 을 썼는데, 글은 가장 생각이 많아질 때에 나오니 (그리고 보통 글 생각이 날 땐 그리 행복한 상태는 아니다) 글쓰기의 본질은 고통에 있는 것 아닐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실제로 꾸준히 실천을 하진 못했지만 늘 의지하는 나의 책,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 속으로 잠시나마 도망쳐 보았다. 그녀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의 짧은 결혼생활을 끝낸 후를 회상하는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고통에 빠져 있는 동안,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두렵고 과거를 돌이키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현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내게는 지금 이 순간만이 가장 안전했다. 홀로 남겨진 매순간이 언제나 견딜 만했다...(후략)"


사실 나는 오늘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서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오피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일은 팀 사람들을 처음 보는 날이니 그 왁자지껄함과 긴장감 사이에 내 마음을 또 가만히 눌러놓을 것이다. 현재가 분주하거나 텅 비어있거나 전부와 전무를 오갈 때, 그리고 그 간극을 견딜 수 없을 때

글로 다시 도망칠 것이다.


오갈 데 없이 나부끼는 마음의 종이 한 장을 붙잡아서 무엇이든 쓴다. 그 순간만큼은 정처없이 헤매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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