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았더냐
나 : 팀장님, 저랑 차 한 잔 하실까요?
팀장님 : 응 그래, 1층 커피숍으로 갈까?
(자리에 앉아서)
나 : 팀장님, 가정과 회사일, 개인의 꿈, 세가지를 모두 붙잡으려다보니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물쭈물)
팀장님 : 그래서... 회사를 그만 다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근 한 달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동네의 정신건강의학과에 가서 '퇴사'를 하고 싶은데 '퇴사'를 결심하는 것이 너무 두렵다고 울먹이며 이야기를 해서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았다. 그렇게 물과 함께 삼킨 두 알의 약은 이내 잔고민을 사라지게 해주었고 급격하게 졸음이 쏟아지게 했으며 두근거리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약 몇 알갱이가 나의 '퇴사 욕구'를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징징거리며 딱 오늘까지만 다니겠다고 수시로 협박하듯 이야기하는 아내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어주던 남편은 그 이야기가 한 달을 향해가자 등을 돌렸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니 나라도 듣기 싫을 것 같고 그럼에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의 외면이 섭섭하고 밉고 동시에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아이들은 그 와중에도 잘 자랐다. 매일 자고 일어나면 키가 더 자라있었고 학교 생활도 즐겁게 했으며 그 우울하고 괴로운 와중에도 꼭 읽어주고 싶던 그리스 로마 신화책도 1~5권까지 시리즈 완독을 했다. 매일 어디에서 목소리가 나와서 그 글자들을 읽어냈는지 신기하고 용하다. 내가 일방적으로 짝사랑하고 있는 글과 말에 대한 열정이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라 생각해서 였을까? 이런 상황에도 책읽기는 멈추지 않았고 아이들도 멈추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날이 매일이었다. 괴로워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날, 아무도 없는 차 안에 들어오자마자 눈물이 떨어진 날, 도저히 사무실 책상에 앉아도 집중이 되지 않아 명태 눈알이 되어 모니터를 뚫고 사시가 될 듯 허무한 얼굴이 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회사에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몇에게는 벌건 눈을 숨기지도 못하고 눈물을 매달고 퇴사를 하고 싶다는 숨기고 싶던 사실을 털어놓곤 했다.
심각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들을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고민을 어쩌자고 그렇게 나눠지자고 했을까? 어차피 책임은 내가 지는거면서 왜 상대방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함께 어두운 표정을 짓게 만들었을까 싶어서 집에 돌아오면 더욱 괴로워지곤 했다. 그러니 글을 쓰고 싶지도 쓸 말도 없었다. 긴 연휴에는 내내 울면서 누워있었다. 머릿속엔 '그만 두고 싶다. 내일 당장 가서 이야기해야지.' 로 가득찼다.
그리곤 며칠 전 팀장님께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내 얼굴빛, 몇 마디 도입부를 듣기만 하셨는데 이미 내가 그만두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럽고 동시에 허탈했다. 나는 그토록 숨기려고 애를 써왔는데 이미 다 들켰었나보다. 나만 모르는 비밀이었던 셈이다. 내가 복직한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부터 팀장님 귀에는 '그 직원이 회사에 돌아온다고? 꼭 퇴사할 것 같던데...' 라는 제보가 들어왔다고 한다.
내가 휴직중에 무슨 일을 해왔는지 아는 사람들에게 나는 가십거리였다. 나만 모르고 있었던 회사내의 무성하던 소문이 나의 퇴사를 점치고 있었나보다. 그리고 나는 예상하던 그 말을 지금 꺼낸 것이다. 팀장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셨고 마치 오랫동안 준비하신 것처럼 그때부터 나와 우리 가정의 미래를 위한 조언을 시작하셨다.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먼저 가보신 팀장님이다. 나보다 볼 수 있는 범위가 넓을 터. 자녀교육에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 부부사이가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남녀의 성역할과 행복한 가정의 조건은 무엇인지 등을 개인적인 경험과 우리 회사 직원들의 평균치를 사례로 들어 자세히 말씀해주셨다.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를 시켜놓고 그걸 다 마셔가며 들었다.
오늘 퇴근길엔 팀장님께서 이렇게 외치셨다.
"집에 가서도 화이팅!"
다른 직원들은 모르는 나와 팀장님 사이의 비밀 하나가 추가된 것이다. 팀장님은 조언의 결론으로, 미래를 생각하면 복직 후 최소한 1년은 다녀보고 결정하는 것이 현명할 거라고 말씀하셨다. 한마디로 지금 복직하고 갓 2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이런 결정을 하고나면 크게 후회할 거라는 것이었다.
'퇴사'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지만 절대로 내지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그 단어를 화두에 올려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직장인의 마지막 카드를 팀장님께 섣불리 써버린 입장이다. 자포자기의 심정이란 것이 이런 걸까? 잘 보이고 싶었던 마음, 동기들처럼 나도 승진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은 모두 자연스레 포기가 되었고 이젠 그저 '직장 내 생존'이 희망사항이 되어버렸다.
이런 내게 유튜브에선 장강명 작가의 인터뷰를 추천해준다. 절대로 전업작가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내용, 도리어 철저히 현실세계에 살면서 많은 경험을 해보고 그로 인해 얻게 된 통찰을 글로 쓰는 것을 추천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역시 삼십대 후반까지 언론사에서 근무했다.
매일 달력의 숫자를 하나씩 지워가며 살고 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다행이고 좋다고 생각하며. 직장을 다니면서도 읽고 쓰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다 무너져가는 마음을 추스르는 데에만 꽤 많은 시간이 걸려서 막상 책을 가까이 하기에도, 키보드에 몇 글자를 두드리는 것에도 짬을 내기가 쉽지 않다. 지금 겪고 있는 온갖 종류의 고초가 나중엔 써먹을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차곡차곡 쌓이는 내면의 고독, 지금 이런 삶의 모습이 최선인지에 대한 고민,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나의 의무와 업무에서 도망치고 싶은 욕구 속에서 살고 있다. 충분히 휴식하며 쓰고 싶은 때에 쓰고, 읽고 싶은 때에 읽는 삶은 어쩌면 유토피아에서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종류의 낙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현실을 더이상 미워하지 말고 이렇게 먹고 사는 데에 아무런 고충이 없이 그저 배부르고 등 따수운 고민(전업 작가가 되고 싶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보자.
어쩌면 내가 정말로 그만두고 싶은 것은 회사가 아니라, 정말 읽은 만한 글,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글을 쓸 당당한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아닐까?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불신, 나의 희미한 열정과 불투명한 미래가 아닐까? 무턱대고 현실을 극복하며 희망을 바라자고 말할 순 없겠지만, 딱 하루치의 자신감과 마음의 안정, 그저 딱 한 번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고, 딱 한 번 정도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 작은 노력이 성공한다면 이틀치, 삼일치, 이런 식으로 조금씩 늘려가보자. 우선 내일은 내일 하루만큼을 살 수 있을 만큼의 기운을 내고 하루를 살며 관찰하고 느낀 점을 수집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보자. 그것도 어렵다면 그냥 하루 배불리 먹고, 등 따시게 자면 그걸로 잘 했다고 여겨보자.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딱 하루만큼 살아내는 것이니까.
엄마도 힘든 날이 있고, 그런 날은 주저 앉을 수도, 몸져 누울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그저 엄마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이들에겐 햇살같이 따뜻한 기운을 주고 있는 것일테니... 존재만으로도 이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니, 대단한 일을 새로 하지 않아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