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하게 우울한 날들의 연속
특히 힘든 것은 주말을 보내고 난 다음에 월요일 출근길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날은 3일 이상 길게 이어진 연휴의 끝이다. 정신줄을 놓고 한참을 유튜브속 예능 프로그램 사이에서 시간을 파먹고 있다가 뒤늦게 누웠다. 이미 새벽 1시가 넘었다. 자려고 누운 이불속에서 마음이 얼어붙는다. 내일은 출근이구나. 다시 회사로 가야 하는 날이구나. 잊으려고 노력했던 그 풍경을 다시 만나야 한다. 정말로 도망치고 싶다.
갑자기 그 생각을 하니 서러워서 눈물이 쏟아진다. 엄마가 보고싶다. 내가 엄마인데도 여전히 엄마가 보고싶다. 그런데 그 그리운 엄마는 사실 지금의 친정엄마는 아니다. 그저 내 존재를 아무런 의심없이 그대로 수용해줄 막연한 품 같은 상상의 존재이다. 그런 존재를 상상하며 버티고 있다. (물론 친정엄마의 품도 따뜻하지만, 그보다 더 넓은 의미가 내겐 필요하다.)
조금 흐르다 그치겠지 싶은 눈물은 이상하게도 멈출 생각이 없다. 결국 티슈통째로 가지고 와서 몇 번을 코를 풀고 눈물을 닦고서야 진정이 되었다. 멈출만 하면 새롭게 시작되는 눈물을 그냥 흐르게 놔두었다. 아기처럼 가슴이 들썩거리게 우는 모습이 가여웠다. 그 무력한 상황이 슬펐다. 그렇게 울다지쳐 잠들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이 새벽2시경이다.
아침이 밝았다. 아침햇살이 밝은 것이지 마음이 맑고 상쾌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세 식구가 옷을 입고 출근과 등교 준비를 할 수 있을 마지막 순간까지 이불에서 나오지 않았다. 간당간당하게 일어나서 빠듯하게 출근 준비를 한다. 제일 먼저 아이들 먹을거리를 챙겨주고 아이들이 먹다가 남긴 것을 내가 먹거나 대충 설거지통에 담궈둔다. 세 식구 양치, 옷 입기, 선크림 바르기, 딸의 머리 묶기, 아들의 시계 차기, 남매의 마스크끼기, 신발 신고 차에 오르기까지 한 단계 한 단계 넘을 때마다 아슬아슬하다.
언제 다툼이 벌어질까, 아이들이 화해하고 싸움이 잦아들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내 감정이 과연 버텨내주겠는가가 관건이다. 그 나이때는 한참 싸우며 자랄 때인데 바쁜 출근길에 1분만 늦어도 피크타임에 걸려서 사무실 도착 시간은 10분 정도 늦어질 수 있기에 출근 시간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다. 폭발하지 말자, 감정아 버텨주어라 라고 주문을 건다.
요즘 마음이 풀 죽은 잎파리 같고, 어느 한쪽은 곰팡이도 난 상태이기에 특히 신경쓰고 있는 것은 괜히 아이들에게 불똥을 튀기지 말자는 것이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가장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나는 자잘하게 다투는 소리가 듣기 싫다는 이유로 버럭 소리를 질러댄다.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하곤 이내 괴로움을 느낀다.
교문에 도착하기 100미터 전에는 잠시 정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비상등을 켜고 아이들을 내려주고 나는 좌회전 해서 회사로 향한다. 그때부턴 시간 싸움이다. 하지만 운전하며 서두르지는 않으려고 한다. 회사 주차장에 도착해서 시동을 끄면 또 한 번 눈물이 핑 돈다. 이제 곧 나는 사회적 가면을 쓰고 하루를 채우겠구나. 그 생각을 하면 내가 너무 불쌍해진다. 이젠 웃음을 잃었다. 웃는 법을 잊었다. 거울을 보면 외롭고 괴로운 여인 한 명이 서 있다. 그 낯빛이 너무 어두워서 꼭 흙빛같다.
사무실에선 꼭 해야 할 업무를 수첩에 적어두고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다...
퇴근 시간.
차를 몰아 학교로 향한다. 아이들은 마치 화살의 활처럼 나에게 달려온다. 빠르고 생기있다. 몇 시간동안 떨어져있었지만 매번 이 순간만큼은 애틋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잃어버린 미소도 입가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얘들아 엄마가 오늘도 돈을 벌어왔어. '얼마간의 돈을 버느라 영혼이 가출해버렸다'라는 말을 속으로만 삼킨다.
차에 태워 집으로 돌아오면 그때부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스스로 씻을줄 안다고 해도 딸의 머리는 내가 감겨줘야 하고, 책가방속 가정통신문과 매일 사용하는 물통은 놓치지 않고 꺼내야 한다. 두 아이의 숙제와 준비물도 챙겨야하고, 함께 먹을 저녁밥도 준비해야 한다. 맛없는 반찬을 내놓으면 아이들은 저녁식탁에서 유난히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다고 매일 소세지 반찬만 줄 수는 없다. 절충안을 찾아서 건강하고도 맛있는 것을 위해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정리를 한다. 싱싱한 식재료부터 늘 쟁여두었다가 가끔씩 먹는 재료까지 모든 재고파악과 추가구매는 중요한 임무이다.
먹고나면 셋 다 나른해진다. 양치를 하고, 아이들이 함께 노는 동안 설거지를 한다.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지만 최대한 빨리 해본다. 그다음은 아이들이 말을 잘 들은 날만 책을 읽어준다. 좋은 마음으로 읽다가 좋은 마음으로 마무리 할 수 있는 날이 있는가하면, 좋은 마음으로 책읽기를 시작했지만 힘든 마음으로 마무리 하는 날도 있다. 제목은 아들이, 말풍선은 딸이, 본문은 내가 읽기로 했다가 남매 중 한 명이 무엇에라도 수가 틀리거나 자기 마음대로 새로운 규칙을 만들겠다고 했다간 또 다툼이 일어난다. 그러면 읽던 것을 멈추고 일어선다.
최근엔 아이들을 재워놓고 글을 써야 하는데 라는 생각만하고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마음이 자꾸만 지하로 굴을 파고 내려가는 바람에 매일 새롭게 끄집어올려 다시 출근길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허무하게 유튜브의 바다에서 허무한 발길질을 하며 시간을 파먹으며 살았다. 몇 십분씩 뭉텅이로 사라지는 시간, 새빨개지는 눈, 멈출 줄 모르는 이명까지... 내 삶은 뻐근한 목과 어깨처럼 갈수록 뻐근해져갔다.
도대체 이런 우울한 글은 왜 써야 하는 걸까? 나는 지금 이다지도 애매하게 우울한 하루를 왜 기록하고 있는걸까? 지금이 제일 힘든 날일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가 맞게 될 인생의 남은 날은 이것보다는 나을 것이 확실하기에 가장 낮은 지점의 하루를 그 좋은 날에 한번쯤 꺼내서 상기해보고 겸손함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살면서 일이 마음먹은대로 모두 이루어지고 행운의 여신까지 내 손을 잡아주는 때가 분명히 있다.
그런 때엔 아주 쉽게 기고만장해져선 그 모든 행운의 연속점이 모두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거의 웬만하면 긍정적인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개인의 노력에 따라 성공과 성장이 보장되는 거라면 아마 몸과 마음이 남아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기분좋은 우연의 연속으로 내가 다시 회복하고, 바라는 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어떤 날이 온다고 해도 요즘같은 명확하게 힘들고 우울한 날들을 잊고 싶지 않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 이 괴로운 하루에 이르게 된 건 아닐까를 의심해볼만큼 요즘은 무력한 상황이다. 앞이 캄캄하고 주변이 갑자기 적막하여 외롭다못해 무섭기까지 한 이런 상황에 놓인 요즘을 살며 이 힘든 하루 하루를 빽빽하게 적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멀리 빛이 보이지도 않는 캄캄함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아직은 나도 알길이 없는 해결의 실마리가 어디 있을 것이고, 나는 또 묵묵히 그 실의 끝을 잡고 한 걸음씩 내딛는 날을 맞게 될 것이다.
화창한 날이 온다면 내게도 과거엔 아주 어두운 하루가 있었음을 잊지 않을 것이다. 사방이 꽉 막혀 어느 누구에게도 무슨 요청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외로운 사람이 나였음을 잊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의 눈빛, 요즘 나의 표정, 내가 내뿜는 검은 아우라까지. 가능하다면, 소화해낼 수 있다면, 겪어내고 이겨내보며 묵묵히 부끄러운줄 모르고 써내려가보고 싶다.
그리고 그 기록을 훗날 여러모로 유용한 용도로 사용하고 싶다. 높이 오를지도 모를 나에게 반대 상황에도 있어봤다는 것을 상기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내가 조금이라도 여력이 된다면 주변을 둘러보고 지금의 나와 같은 눈빛을 가지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조용히 다가가 옆에 있어주는 일을 하는 이유로도 사용하고 싶다. 이 글을 쓰고 화면을 덮고, 이불에 누우면 내일도 오늘과 같은 정도의 우울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
야심찬 마음으로 복직했는데 세 달도 안 되어 내 마음은 고장이 났고, 일상은 힘겹게 굴러가고 있으며, 휴직중에 했던 모든 일들은 빛을 잃었다. 인생에서 이처럼 뾰족뾰족한 가시덤불의 한가운데에서 혼자 견뎌야 하는 시기도 올 수 있다는걸 느끼고 있다. 그 가시덤불숲도 분명히 어딘가 테두리가 있을 것이고, 밖으로 나가는 틈도 있을 것이다. 찾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파도 아주 조금씩 한 발자국씩 떼어보는 수 밖엔 다른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이라도 덜 찔리게 우왕좌왕하지 않고 딱 한 방향으로만 계속 가보는 것이다. 지금보단 모든 것이 모든 면에서 나아질 거라는 긍정성 하나만은 잃지 말자.
아들의 태명이 '긍정'이였고, 오늘 흘린 눈물은 딸이 만들어준 손수건으로 닦아냈으니, 내가 그 둘을 낳고 기르며 이처럼 단단한 엄마가 되는 중이니, 모든 상황은 차츰 나아질 것이다. 나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