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두 쪽 나는게 아니었구나.
딱 오늘만 쓸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어제밤까지 마음을 빗자루로 살살 쓸어내듯 먼지나 찌꺼기 같은 걱정거리는 모두 털어버리고 좋은 것만 남기듯 머리와 마음을 청소했다. 그리곤 마침내 퇴사 결심을 굳혔다. 그리곤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을 학교 앞에 내려주고 출근길에 올랐다. 딱정벌레처럼 따닥따닥 붙어서 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출근차량의 행렬을 바라보며 이것도 얼마 안 남았구나, 다시는 이 길에 다시 들어서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마음을 정하고 나서인지 살짝 콧노래가 날만큼 출근길이 상쾌했다.
지난주에는 한적한 곳에서 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오늘은 팀장님 자리에서 짧게 나의 의사를 말씀드렸다.
"팀장님, 마음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응, 그래? (남편과) 이야기 잘 해봤어? 알았어."
많이 놀라셨을텐데 담담히 내 결정을 수긍해주셨다. 바로 인사팀에 전화를 했고, 담당직원을 만나서 퇴사의 이유를 밝히고 대략적인 절차를 안내받았다. 정말로 퇴사한다.
자리로 돌아와보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전화가 물밀듯 밀려온다. 하나씩 메모하고 처리한다. 그와중에 내가 새롭게 맡았다가는 인수인계시에 곤란해질 것 같은 업무도 있어서 같은 팀 직원들 중 몇에게는 1:1로 만나서 나의 퇴사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들과 한 명씩 대화를 나누며 마음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가가 붉어진다. 어떤 직원은 방방 뛰면서 함께 기뻐하고, 나의 진짜 꿈을 응원하기도 하고, 어떤 직원과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양쪽 다 눈물이 고여서 서로 대사 없이 등만 쓰다듬기도 한다.
대체로 내가 얼마나 고민하며 결정을 내렸을지에 대해 공감해주었고, 최근에 부쩍 파리하게 변해버린 나의 안색을 걱정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가시덤불을 손으로 헤쳐나가며 출구를 내는 중이다. 온몸이 가시에 찔려 밤마다 진물을 흘리듯 눈물을 흘렸는데 이제 그럴 일은 없겠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살짝 미소를 띄며 퇴사 후의 내 삶을 단단히 다져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 것을 보면 나는 참 행운아인듯 하다. 가장 힘든 순간을 막 지나보내는 중이다.
어떤 이는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반대로 내 쪽에서 눈물이 나서 잠시 멈추었다가 대화를 이어야하기도 했다. 그렇게 감정이 휘몰아치는 하루를 보내고 피자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설거지를 하고 글을 쓰려고 앉았다. 이제 마침내 평온한 나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면 되는거였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을 걱정했던 걸까?
바로 '소설쓰기'를 가르쳐주는 교육센터의 과정에 수강신청을 했다. 나는 소설가가 되려고 한다. 그렇게 17년간 다니던 회사를 뒤로하고 자기계발서 한 권과 에세이 한 권을 출간했던 경험을 뒤로하고 또다시 새로운 도전의 시작점에 섰다. 이번엔 무리하지 말아야지, 이번엔 남보다 앞서가려고 욕심내지 말아야지. 잘 될진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제2의 인생을 사는 것이니 앞으로 못해도 20년은 글을 쓰고 말을 하며 먹고 살 요량이니 길고 넓게 보면서 천천히 해보려고 한다.
회사에선 그렇게 매일같이 진로를 선택하느라 혼신의 힘을 다하며 살아가지만 또 가정에서도 할 일이 있다. 아이둘의 독감주사를 맞기 위해서 퇴근 후 바로 병원에 들렀다. 병원에서 아들의 친구와 그의 엄마를 만났다. 퇴근 후 바로 온 나를 보며 친구 엄마가 이야기했다.
"일 하시지요?"
맞다. 나는 '일 하는 엄마'이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나는 전업주부가 되어 노트북을 열고 시덥잖은 글이나 끄적거리는 백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비하하듯 나 자신을 평가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시 나는 새로운 꿈을 품는 중이다. 퇴사 과정에서 마음과 몸에 병이 생겼다. 그것을 충분히 치료하고 휴식할 것이다. 그리고 건강해진 몸과 마음 위에다가 싱싱한 꿈을 심을 것이다.
짧은 글부터 긴 글까지 이미 써 놓은 글부터 앞으로 쓰고 싶은 글까지 마치 줄줄이 기차처럼 기다리고 있다.
- 글쓰기는 인생을 찬란하게 만든다.
- 메모를 통해 시간도, 업무도, 인생도 다듬어나가는 이야기
- 워킹맘 다이어리 (지금 이 시리즈)
- 단편 소설 (내 인생 첫 번째 소설) 완성해보기
여기까지 오느라 참 오래 걸렸다. 40년이나 걸렸다. 이제 내 선택에 아무런 걱정도, 염려도, 괴로움도 묻어있지 않다. 아프고 힘들던 시간은 대부분 지나갔고 이제부터는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대신 담담하고 당당하게 하나씩 해보는 것 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이런걸 해보려고 그토록 자유를 꿈꾸지 않았던가! 결정도 내가, 책임도 내가, 자유도 내가 가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고 해도 근 한 달은 마음속 생각보따리를 얼마나 풀었다 묶었다 했는지 손이 아프고 보따리가 너덜너덜해질 지경이다. 이제 이런저런 상황을 제시해놓고 어느 쪽을 선택할 지에 매달려서 나를 괴롭히지 않으려고 한다. 확실하게 정한 딱 한 방향을 향해서 무모하지만 씩씩하게 나아가볼 차례다. 소식을 들은 후배들은 앞다투어 마지막 남은 일감을 자신에게 달라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한다.
내가 후배들에게 해준 거라곤 따뜻한 밥 한끼를 개인적으로 사준 것 외에는 없을텐데, 늘 잿빛으로 출퇴근하던 내 모습을 마치 다 감싸주겠다고 생각하는 듯 마지막까지 배려하려고 노력하는 그들을 보니 차가웠던 마음이 따뜻해져온다.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너무나 외로웠다. 사방이 얼음판이라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들었고, 사람이 없는 곳만 나타나면 바로 참았던 눈물이 떨어지곤 했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귀에는 계속 이명이 발생해서 조용한 밤에 잠을 쉽사리 이루기 어려웠다. 약을 먹으면 나른해졌고, 약을 먹지 않으면 불안했다. 단단히 병들어버린 마음도 마치 감기가 낫듯 나아지는 날이 올 수 있다는게 믿기지 않을만큼 힘들었다.
'퇴사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살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고 침묵으로 눈빛으로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었다. 물론 그 마법의 문장을 아무때나 남발하며 살진 않겠지만, 어쩌면 내 인생에 딱 한 번 쓸 수 있는 조직 생활을 그만두는 마법의 말일 것이다. 앞으론 두 번 다시 조직 안에 들어가서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섬처럼 떨어져서 프로젝트 단위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지며 깔끔하게 살아가고 싶다.
세상이 두 쪽 나지도 않았고, 하늘이 노랗게 변하지도 않았다. 내 마음은 더 없이 기분좋고 홀가분하다. 큰 결심을 내린 나, 그 결심을 한 사람씩에게 진솔하게 이야기했던 나, 아무래도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더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되는데 그런 것을 모두 감수하며 일주일 더 업무 마무리와 인수인계를 위해 기꺼이 출근할 나를 꼭 안아주고 싶다. 정말로 마지막 출근날까지 내가 나를 안아주듯 심리적 포옹을 많이 해줘야겠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자랑스럽다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 중, 퇴사 후에 같이 밥 먹고 퇴사를 축하하는 자리를 갖자고 이야기해주신 분이 기억에 남는다. 우울하게 백수생활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노고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큰 결단을 내린 나를 마음껏 격려해주는 자리를 혼자라도 가지려고 했는데 그런 시간을 함께 갖자고 먼저 말씀해주셔서 기쁘고 감사했다. 축하받을 결정을 했고, 앞으로도 축복 가득한 길을 걸을 거라는 걸 내가 먼저 나에게 이야기 해줘야지.
**아, 수고했어.
걱정말고 퇴사 후의 삶을 누리자.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모두 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지난 40년을 온통 사랑으로 기억하자.
앞으로 예순까지, 20년간은
죽기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로 꽉 채워서 살아보자.
하고 싶은 걸 실컷 해볼 수 있는 이 귀한 시간을
아이들과 멋지게 만들어 나가보자.
네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은
전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마땅한 일들이었어.
이렇게 용기를 갖고 큰 결심한 것을
아주 많이 칭찬해주고 싶어.
대단하다. 장하다. 수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