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세 건의 작별인사
메모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퇴사를 결심하고 업무수첩에다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인사 나눌 사람들의 목록을 쭉 써내려갔다. 썼다가 지운 사람도 있고, 절대 놓칠 수 없지! 라고 생각하며 목록에 다급하게 넣은 사람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보고 싶은 사람, 회사 다니는 내내 나를 보는 눈빛이 참 따뜻했던 선배를 먼저 만나기로 마음 먹었다.
사내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오전에 좀 만날 수 있겠냐고 했더니,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휴직중에 선배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복직하고 나서야 들었다. 몇년 늦었지만 부의금을 드렸다. 마음속 아픔이 조금이나마 어루만져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선배는 휴직중에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귀로 들은 소식을 입으로 꺼내지 않고 조용히 응원하고 있었다고 한다. 삽시간에 퍼져버린 나에 대한 온갖 소문들, 그것도 내가 퇴사를 마음 먹은 데에 꽤 큰 영향을 끼친 요인 중 하나이다. 회사에서 가십의 대상으로 살아가고 싶진 않다. 나는 회사 안에서 절대로 관심을 받고 싶지 않다. 선배는 그런 나의 성향을 알고 조용히 지지하는 쪽을 선택한 고마운 분이다.
마지막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악수하자고 손을 내미는 선배. 늦둥이 여동생 나이가 나와 같다며 늘 나를 늦둥이 여동생처럼 보살펴주었던 선배였다. 부의 봉투를 받아도 되냐고 망설이다가, 이걸 '식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면서 퇴사 후에도 밥을 사주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서던 분이다. 이렇게 첫 번째 작별 인사를 마쳤다.
두 번째 작별 인사는 바로 옆팀의 선배님이다. 이번엔 나의 목록에 올라와 있던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게 생각하던 선배는 맞다. 어떻게 알게 되신건지 정보 레이더에 포착이 된 나의 소식을 듣고는 황급히 오셨다. 그 소식이 사실이냐면서.
내가 유튜브 유명 채널에 게스트로 등장해서 인터뷰 한 것을 가장 먼저 찾아내신 분이다. 어떻게 보면 회사 내에 나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게 퍼지게 하신 장본인일 수도 있지만 전혀 그에 대한 원망의 마음은 없다. 모든 일은 다 그럴만한 연유에서 그럴만한 타이밍에 그럴만한 방법으로 펼쳐진다고 생각하며 사는게 속 편하다. 실제로 미움의 감정은 없다.
선배는 내가 완전 신입이던 시절부터 옆팀에서 근무했기에 나의 모든 성장과정을 봐오신 분이다. 내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1부, 2부로 나누어서 방영된 유튜브 속 인터뷰 영상을 꼼꼼히 시청하신 분, 혼자 보기 아까워서 여러 사람들과(^^;) 영상을 공유해서 함께 보신 분이다. 그것도 애정의 한 방법이란 걸 잘 안다. 그 인터뷰에서 나는 '어른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그래서 선배와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왜 퇴사를 하는 거야?"
"가슴속에 꿈이 있는데, 그걸 모른척 하기가 힘들어요. 차장님은 꿈이 있으세요?"
"나도 모르겠어. 그게 문제야. 나도 내 꿈이 뭔지 모르겠어. 그 생각만 하면 답답하네."
"저는 9~6시까지 주어진 일을, 주어진 방식으로 해내는 분들이 대단해요. 저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적응이 잘 안 돼요."
선배는 대화를 마치며 꼭 함께 밥을 먹자고 하셨다. 어쩌면 퇴사 후 다시는 못 만나게 될 지도 모를 나에게 따뜻한 밥 한끼를 사주고 싶으신 마음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예전의 나는 반드시 돌려받을 것을 생각하며 베풀곤 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삭막한 삶의 방식인지를 깨닫곤 그러는 걸 딱 끊었다. 선배는 돌려받지 않을 생각으로 나에게 베풀고자 하신다. 이 마음을 잊지 말아야지.
세 번째 만남은 점심 식사 모임이었다. 가장 가까운, 제일 편안한 사람들과 함께 한 모임. 백짬봉과 탕수육을 먹었다. 음식은 너무나 맛있었고, 기분은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이것도 곧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다. 굳이 사진을 찍자고 해서 핸드폰에 사진 한 장도 남겼다. 글 쓰기 전 다시 열어보니 웃고 있지만 짠한 내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나머지 네 동료의 미소가 너무나 소중하다.
결국 짬뽕과 탕수육을 먹고나서는 체했다. 요즘은 좋은 것을 봐도, 맛있는 것을 먹어도 사실 하나도 기쁘지 않다. 마음은 자꾸만 무거운 추를 매단듯 땅으로 꺼진다. 퇴사 의사를 밝히고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이 쉽진 않다. 수시로 인사팀 직원과 통화를 하며 퇴사 절차를 주고 받는데 사무실에서 조용하게 전화를 한다고 해도 곤란한 마음이 든다. 업무 인수인계도 해야 하는데 그야말로 속시끄러운 상황이라 지금껏 하던 업무를 찬찬히 정리하는 것도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내일은 꼭 깔끔하게 처리해야겠다.
이렇게 인생에서 먹구름이 낀 듯, 팽팽하던 고무줄이 늘어나버린 듯, 재미있던 연재 만화가 강제로 폐간된 듯, 요즘 나의 삶은 흥미가 없는 상태다. 그러니 하루 하루 오늘은 행복했다거나, 오늘은 불행했다고 들쭉날쭉한 기분 그래프를 그리는 대신에 가만히 내 마음을 쓰다듬는 일에 열중하고 싶다.
아이들과 밤마다 읽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마무리했고, 요즘은 세계사 책을 함께 읽고 있다. '신화'는 상상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세계사'는 실제로 있었던 진짜 이야기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몹시 신기해했다. 신화 이야기 중에서 '트로이 전쟁' 같은 것은 실제로 유적이 발견되어서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그 둘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더니 더욱 신기해했다.
지금 내게도 삭막하고 외롭고 괴로운 이 현실을 이겨낼 상상의 세계가 필요하다. 퇴사 후 바라던 일을 하나씩 해내고, 여러가지 자유와 여유를 누리는 상상. 그런데 그에 앞서 조금 더 회사 안에 있는 소중한 인연들과 작별인사 하는 시간을 진지하게 가지려고 한다. 초콜릿 선물세트를 주문했다. 내일은 우리 회사 건물을 청소해주시는 환경미화 여사님께 감사인사와 작별 인사를 동시에 전하려고 한다.
늘 나를 "**씨~"라고 친근하게 부르면서 사람을 진심으로 가슴 따뜻하게 대해주시던 그 분께 마지막 인사를 꼭 하고 싶다. 달콤한 초콜릿이 매개체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상상하는 장면은 진지하고 아름다운 이별을 하면서 회사 안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던 사람들과 가슴 따뜻하게 헤어지고, 퇴사 후에는 내 인생을 뿌듯하고 상쾌하게 꾸려나가는 일이다. 때로는 선물이, 때로는 식사가, 때로는 담소가 나를 이별의 세계로,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문으로 인도한다.
나는 이제 정말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두려움도, 외로움도, 망설임도 잘 다스려서 보내주고, 따뜻한 온기를 자꾸만 나에게 불어넣어보자. 비록 계절은 점점 추운 날씨로 바뀌고 있지만 마음을 달구고, 꿈을 향한 나의 열정은 더 뜨겁게 지펴보자. 그러려고 이렇게 큰 결심을 한 것이니, 온 가족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니, 이제 더이상은 물러섬 없이 나아감을 택하려 한다.
걱정은 굿바이!
행복은 웰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