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무심코 지우는 상대의 모습
미드 <와이 우먼 킬>은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한 저택에서 살아온 세 가정을 다룹니다. 같은 곳에서 시기를 달리해(1963년, 1984년, 2019년) 살아온 세 부부의 삶을 조명하며 세 명의 부인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각각의 계기와 과정을 보여주죠.
이 중에 가장 눈길을 끌었던 배역은 63년부터 살기 시작한 가정주부 베스 앤(지니퍼 굿윈)입니다.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보이지만 그녀는 유연하고 입체적인 캐릭터예요. 그걸 모르는 유일한 사람은 오랜 세월 그녀와 함께 산 그녀의 남편 롭(샘 재거)뿐입니다. 이사 온 후 새로 사귄 친구들마저 그녀가 가진 넓은 스펙트럼에 계속 놀라는 데 말이죠.
베스 앤은 남편이 원하는 모습만 보여준 걸까요?
롭이 부인에게 원하는 모습만 본 걸까요?
우리는 상대에게 기대하지 않는 모습을 마주할 때 스치듯 지나칩니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리는 모습이 우리의 생각보다 많을 수 있어요.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일 수 있는데도요. 당신은 상대의 어떤 모습을 저장하고 있나요? 당신이 무심코 지우려는 상대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최근에 엄마 자서전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쓴 자서전을 모아 책 한 권으로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거라 실제 분량은 얼마 안 돼요. 분량이 적어도 자서전은 자서전인지라 살아온 이야기를 인터뷰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원래 생애 구술 작업을 하고 싶었던 대상은 외할머니였어요. 작년에 우연히 외할머니와 밥을 먹다가 물어본 질문 때문이었죠.
“할머니는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
“나? 결혼 전에 법원이랑 은행 다니던 때.”
자식과 관련된 어느 시기 아니면 친구들과 여행 다니고 댄스 공연하던 복지관 시절(할머니의 70대 시절)로 답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할머니는 처녀 시절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벌어 쓰던 시절이 좋았다고 하면서 퇴근하면 동료들과 놀러 다니는 시간이 즐거웠다고 했어요. 인기가 좀 있었냐고 물으니 빙긋이 웃습니다.
우리 외할머니는 1930년생으로 무려 91세예요. 식민지 시대부터 6.25 전쟁까지 다 겪었죠. 그 옛날에 고등교육을 받아서 법원과 은행에서 일했던 인텔리 여성이었기도 합니다. 스물다섯에 결혼했는데 할머니 시대엔 늦은 나이의 결혼이었죠. 결혼 전까지 일했다고 했으니 꽤 오랜 기간 일했을 겁니다.
자서전 쓰는 프로젝트는 외할머니를 인터뷰하고 싶어서 참여했어요. 할머니가 살았던 시대의 일하는 여성상이 궁금했거든요. 당시의 오피스룩은 어땠는지, 사내 분위기며 회식은 잦았는지, 윗사람은 어떤 갑질을 했는지, 진상 고객은 어떻게 물리쳤는지 알고 싶은 게 수두룩했습니다.
질문을 빽빽하게 준비했지만 인터뷰 자체가 불가능했어요.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는데 생각보다 많이 진행되어 본인 나이나 부모님 성함 등의 기본 정보도 기억을 못 하시더라고요. 일찍 왔어야 했어요. 적어도 작년에 그 이야기를 나눴을 때 이것저것 더 많이 물어봤어야 했는데... 물론 작년이었더라도 내가 궁금한 만큼 자세히 알 수는 없었을 거예요. 여든 중반이 넘어가면서 할머니는 급격히 약해졌거든요.
이미 프로젝트에는 참여했고 다시 대상자를 물색하기엔 시간이 부족한 터라 별수 없이 엄마로 대상자를 바꿨어요. 엄마는 내가 제일 잘 안다고 느끼는 사람이라서 사실 크게 궁금한 게 없었거든요. 엄마도 나같이 평범한 사람한테 쓸 이야기가 있을까 의아해하면서 자신이 자서전 대상자로 적절치 않은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녹음기를 틀어 놓고 인터뷰 세팅을 마쳤는데도 막상 시작하려니 어색하고 서먹서먹하더라고요. 기본 정보는 이미 다 알아서 물어보기도 민망하고요. 그런데 이야기가 풀리기 시작하니까 쉴 새 없이 나오는 거예요. 엄마를 인터뷰했던 날마다 새벽 4시에 잠들었습니다.
엄마는 초등학교 때 전차를 타고 친구들과 함께 종로에 나가곤 했대요.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서울에 큰 홍수가 나서 집이 잠겼고 대피소로 옮겼는데 당시 대학생이던 같이 살던 사촌오빠가 집을 지키겠다고 혼자 지붕에 올라가 있었다고 합니다. 밥때가 되면 수영을 해서 대피소로 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집을 지켰다는 회상, 지금은 자취를 감춘 전차의 추억 등 이야기를 들을수록 엄마가 겪어온 세월의 폭은 내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넓더군요.
고등학교 시절 엄마는 꽤나 까진 아이였나 봅니다.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를 본다고 영화관 앞에서 단속하던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사복으로 갈아입고 청불 영화를 보러 다녔대요. 한 번이 아니더라고요. 예로 든 영화만 2개나 돼요. <미워도 다시 한번>, <별들의 고향>.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독서실에 다녔는데 공부하러 간 게 아니라 집에 가기 싫어서 다녔대요. 독서실에 가면 책을 펴놓고 잤는데 어느 날 화장실에 다녀오니 책 위에 편지가 놓여있었다지 뭡니까. 근처 남고에 다니는 학생이 3:3 미팅을 제안했대요. 시내에 있는 태극당에서 만나 팥빙수랑 소보로를 먹었던 그날이 엄마의 첫 미팅이었지요. 나는 대학에 와서야 처음 미팅을 해봤는데. 뭘까요? 이 진 것 같은 기분은.
대학원 다닐 때 한참 살사에 빠졌던 적이 있어요. 집에 이야기 안 하고 한 학기를 휴학했었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엄마가 딸이 춤바람 난 줄 알고 걱정이 많았거든요. 이제 보니 엄마야말로 초등학교 때는 포크댄스로 시작해서 고등학교 때는 고고 댄스를 추는 학생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망해서 등록금도 밀렸던 양반이 친구들이랑 놀러는 많이 다녔더라고요.
나는 엄한 아빠 덕에 고등학교 때까진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온 적이 없어요. (아빠 왈 자고로 잠은 내 집에서 자는 거다!) 엄마의 중고등학생 시절은 자유분방 그 자체였어요. 친구네 집에서 먹고 자는 건 예사고, 중2 때 친했던 담임 선생님 댁에서도 여러 번 자고 왔다고 합니다.
외할머니댁에 갔을 때 비록 인터뷰는 못했지만 소득이 있었어요. 앨범을 하나 찾아서 들고 왔거든요. 그 앨범에 엄마 예전 사진이 몇 장 있는데 처녀 때 패션이 장난이 아닙니다. 보라색 정장도 있고 청록색 정장도 있고. 대체 이런 옷은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니 양장점에서 맞춰 입었대요. 요즘 옷을 맞춰 입는 건 흔하게 할 수 없는 고급진 경험인데 그때는 다들 맞춰 입었다네요(테일러가 몸의 길이를 재고 직접 옷감을 고르는 걸 상상하니 영화 <킹스맨>이 생각나요). 좋았을 것 같아요. 내 몸에 딱 맞게. 따로 수선할 필요 없이 말이죠. 표준화된 기성복 사이즈에 몸을 맞추지 않아도 되다니 부럽다.
엄마가 젊었던 시절에 핫플레이스는 음악다방이었습니다. 음악만 신청하는 줄 알았더니 즉석 미팅도 많이 이뤄졌나 봐요. 여자들끼리 가면 남자들끼리 온 테이블에서 음료를 보내고 슬쩍 합석해도 되냐고 제안을 한대요. 그렇게 즉석 미팅을 하면 마지막에 소지품 고르기를 해서 일일 파트너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런 건 우리 때랑 크게 차이가 없는 거 같죠?
인터뷰하면서 엄마도 나도 꽤 즐거웠어요. 엄마도 한참을 잊고 살았던 기억을 되짚어가며 케케묵은 보따리를 풀었고 그 덕에 나는 엄마의 다른 면모를 많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 듣는 내내 “세상에 우리 엄마에게 이런 모습이”를 연발했어요. 내가 세상에 없던 시절 엄마의 모습. 반항적이고 대담하고 자유분방하던 그녀의 모습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한편으론 이런 사람이 보수적인 남편에 맞춰 사느라 두 아이의 엄마로 사느라 한평생 답답했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나만큼 우리 엄마를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거라고 자신했는데 아닌 거죠. <와이 우먼 킬>의 베스 앤과 남편 롭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우리 외할머니도 엄마도 베스 앤 같은 사람인데 나야말로 롭이 부인을 바라보는 시선처럼 그녀들을 바라봤던 게 아닌가 하고요.
입체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겠죠. 단지 내가 모를 뿐.
이번 질문은 당신은 누구를 인터뷰하고 싶나요?입니다.
평소에 궁금해 해던 사람일 수도 있고,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오히려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죠.
누구를 인터뷰하고 싶은지,
왜 그 사람을 인터뷰하고 싶은지,
인터뷰를 한다면 대상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 3개를 적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