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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Feb 28. 2020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시대의 불안  

사소한 영감 일지 feat. 보통의 불안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때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 알랭 드 보통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토록 처절하게 찌질하다. '홀로' 태어나서 '홀로'가는 인생임에도, 나를 향한 인생이 아닌 '남보다 더 나은'이라는 비교 행위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끊임없이 남들, 즉 대세의 미덕을 향해 따라가기 바쁜 삶을 살아간다.  혹자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당연한 본능이라 하고, 알랭드보통 역시 '준거집단'이라는 불안을 유발하는 주범을 소개한다.


어떤 것이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심리를 생각해보면 이런 박탈감도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 어떤 것 - 예를 들어 부나 존중 - 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 알랭드보통 <불안> p56
Photo by matteo-catanese on Unsplash


슬픈 일이다. 나 역시 이 사실이 진정으로 슬프다고 느끼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세의 미덕을 따라 살아가려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 시대에 인정받는 표준적인 삶(?)이란 10대에는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기, 20대에는 안정적인 직장 들어가기, 30대에는 결혼해서 집 한 채 장만하기 등... 끝없는 시대의 과업을 안겨준다. 대세의 미덕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편이 행복한 삶을 가져다준다고 속삭이는 사회는 어느새 우리를 과업의 미로에 갇히게 만든다. 자본주의 우선순위, 은연중에 티브이 속의 아나운서의 보도 내용, 드라마 주인공의 배경, 있어 보임을 자극하는 광고 문구, 부모님의 옆집 아들딸 비교 훈계,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객관식 정답 추구형 가르침, 즐거움만 가득한 SNS에는 무의식 저편에 인생을 선택할 때 이런 기준은 이미 정해져 있냥 믿게 만들어버린다. 어린 나이에 아이들은 이 어마어마한 어른들의 콘텐츠를 은연중에 받아들이며 인생의 길은 하나라는 외길 인생 미로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가장 큰 구멍이 존재한다.
"내가 없다."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는 궤도권에 들어간 사람은 잘 살고 있던 어느 날 '자신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무렵 큰 충격에 휩싸이며,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에 대한 불안이 고개를 든다. 반대로, 궤도권에 벗어난 자는 '자신의 가치 기준'이 없을 경우 사회적 박탈감으로 인한 자괴감이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나 자신을 몰아세운다. 나는 운 좋게도 양쪽의 궤도권을 들락날락하며 반대편의 불안을 모두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서른 중반을 넘어서야 대안 없이 일단 궤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결정했고, 내 인생의 방향과 가치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지만 여유 있게 돌아보는 중이다. 10년 만에 처음 퇴사라는 것을 해보고 끄적였던 불안에 대한 자아성찰적인 일기이다.


Photo by tim-foster on Unsplash



다시 시작이다. 오랫동안 묻어둔 작은 크랙을 따라 불안한 감정이 올라온다. 남들은 모두 즐기고 있는 것만 같은 유쾌한 선율 속에 망가진 LP판의 긁히는듯한 잡음, 내 일상만 온통 삐걱거리는 기분이다. 스스로에게 내려놓지 못한 많은 욕심들이 모여, 나를 다그치다 보면 이내 마음이 덜컹거린다.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아도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아 불안하다. 오히려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힘들어 겉으로 맴도는 상태가 반복된다. 내가 내린 결정이 잘했다 싶다가도 사회에서 말하는 기준과 멀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면 금세 불안해진다. 틀에 갇힌 삶을 비판해오던 사람이었던 스스로가 그 안에서 발버둥 치는 기분을 알아차렸을 때, 오히려 더 괴롭다. 내가 선택한 결정, 노력, 가치가 결국에 자본으로 환산되어야 하고 남들의 인정을 요구한다는 것에서 결국 다시 제자리구나 싶어 졌다. 다시 나와의 대화를 시도해보려 한다. 이 감정은 어디에서 왔을까? 과거를 되짚어 보다 스치듯 사실 하나가 박힌다.

과거에 지금과 반대의 상황에 있었을 때조차,
내가 느꼈던 불안의 감정은 늘 존재했다.

불안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 불안전한 감정의 속성은 내 안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불안을 느낄 때 나를 들여다보면 ‘내 중심 안에 있는 나’와 ‘사회적으로 바깥에서 보여지는 나’가 늘 합치되어 있지 않았다. 조금 더 단순히 말하자면,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행동하고 노력하지 않을 때, 곧잘 괴로움을 느꼈다. 나를 중심에 두고 안과 밖의 방향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을 느낄 때 불안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회사를 다닐 때는 사회적인 내가 한국 사회의 틀에서 요구하는 대다수가 말하는 성공의 조건에 향해 있었기에 남들의 시선에 대한 불안감은 크게 없었다. 하지만 내면의 나는 진짜 하고 싶은 일과의 간극, 조직의 무능함, 회사 업무의 본질에 대한 회의감 등이 나를 괴롭혔다. 점점 나로 향하는 가치와는 멀어지고, 조직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치를 붙들고 살아가는 자신이 무서워졌다. 지금은 괜찮을지라도 또다시 10년 후가 되었을 때 나 자신이 아닐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내면을 향한 시도를 하지 않은 스스로를 후회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반대의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에서 불안은 없어졌을까? 아이러니할 수도 당연할 수도 있지만, 결국 나는 반대편의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 사회적인 기대치에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들을 얼마나 빨리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조급함, 남들의 단순한 호기심으로 뭐하고 사냐고 물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들,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의 부재는 자본주의 속에 사는 이상 어쩔 수 없나 싶은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양쪽을 다 경험했으니 불안이라는 감정은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감정임을 점차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 불안의 감정과 어떻게 섞이며 살아갈 것 인가이다. 이런 고민의 시간들이 삶의 태도와 가치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으며, 불안보다는 평안함으로 더 많이 섞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불안을 대하는 나의 대처를 생각해보게 한다.  


서로 정반대의 상황에서 느껴온 불안감의 근원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감정을 줄여나가는 방법은 불안을 느꼈을 때와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내면을 향한 나'와 '외부로 향한 나'의 간극을 좁히는 일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내면을 향한 자아가 외부의 나보다는 보다 크고 단단해져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건강한 감정은 자신에서 비롯되어야 하지, 외부의 시선에서 들어오면 금세 어지러워지고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기 어려워진다. 또한 외부는 ‘나’라는 개인보다 절대다수라서 사회적 편견, 틀에서 만들어진 성공의 조건, 요구사항에 너무나 쉽게 노출되고 흔들릴 수 있다. 그렇기에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와 기준을 갖고, 내면을 단단히 만드는 일이 우선되어야 외부의 자극에 최소한으로 흔들리다가도 바로 설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을 건강히 하는 혼자만의 대화를 시도해보자. 늦은 밤 작은 끄적임도 좋고, 아침에 마음을 고요히 하는 명상과 산책도 좋다. 걷고, 쓰고,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일은 생각이 고이지 않고 깨어나게 하고,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해나가는 시간들은 서서히 건강한 자아의 크기를 자라게 한다.   


두 번째는 자신의 삶에서 우선하는 기준이 정해졌다면, 스스로를 믿고 작은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다. 실패일 수도 성공일 수도 있는 작은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작은 실천(small step)을 해나간다. 작가가 꿈이라면 매일 짧은 습작을 하며 자신과 믿음을 다져나간다. 외국어를 잘하고 싶다면 매일 단어를 하나씩 배워나가는 식으로 나와의 작은 약속을 자신에 대한 신념으로 바꿔나간다. 작은 실천이 쌓인 결과를 성찰해나가며 한 발자국씩 때다 보면 길이 보이고 불안감이 줄어든다. 나의 작은 걸음에 아낌없이 칭찬해주자.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Photo by alex-alvarez on Unsplash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구에 사는 이상 사회적 기대에 완전히 벗어나 살 수는 없다. 사회적인 편견에 메이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밀고 나가는 모든 과정에서 불안이라는 감정은 조금씩 고개를 들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섞여 나가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불안이라는 감정의 싹과 어떤 방식으로 섞이며 살아갈지는 각자의 몫이다. 불안의 싹이 걷잡을 수 없이 돋아날 때 그 감정에 매몰되고 말 것인지, 불안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세상과 섞이며, 세상의 중심이 외부가 아닌 나를 향하는 행동을 하고 나아갈지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어떤 불안과 맞서 싸울 필요는 없다.
불안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그 감정조차 자연스러움을 느끼고 유연하게 마주하는 것, 그 속에서 또 한 번 인생의 가치를 바로잡아 보는 시간으로 삼으며 즐기는 것, 그것이 인생임을 알고 살아가면 좋겠다.


*Main image source: photo by Matthew-henry on Unsplash

#불안 #이시대를살아가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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