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에 맡기는 것이 힘들었던 이유
아이를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비교가 올라온다.
'상처받은 내면아이'라는 개념을 접하면서는
더더더 그랬다.
'와 똑같이 상처받았는데
저 엄마는 애를 기똥차게 잘키우네.'
'저 엄마는 사랑 받았네. 받았어.'
'차라리 애 잘키우는 내적불행이였으면 좋았을껄..'
그렇게 되도 않은 막말 퍼레이드로
애 못키우는(?) 나를 합리화 하곤 했었다.
어쩌면 생각없는 나의 이런 말들이
아픈 가슴에 소금을 뿌린건 아닌지
후회가 된다.
아이가 커갈수록 깨닫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토록
아이를 기관에 보내지 못하고
끼고 있었던 것이
결국 '나의 상처' 때문이였다는 사실이다.
뭐든지 다하고 싶었던 4,5살.
할머니의 병간호로 외할머니집에
거의 1년 가까이 맡겨졌었다.
7살 무렵부터 시작된 엄마의 장사로
엄마의 자리가 또 비워져버렸고...
초등학교 어느학년 때 쯤,
나는 또 한 번
엄마의 외할머니의 병간호로
동생과 함께 이모집에 맡겨졌었다.
그 땐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나를 죽여왔었던 행동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5살 그 아이가 얼마나 눈치가 보였을까,
엄마의 품에서 뒤집어지고 싶었던 5살 아이가
사이 나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틈에서
얼마나 눈치가 보였을까 싶어서
맘이 아린다.
외로운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서운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지나갔던 그 시절.
내가 맡겨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아이는
그 상처가 아픈지도 몰랐다.
그저 아이를 남의 손(기관)에 맡긴다는 것이
두렵고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망설여졌을 뿐.
내 의식으로 올라오지 않았던 상처,
비록 의식으로 올라오진 않았지만
뼈에 사묻히듯 남아있던 상처였기에
'괴롭다 괴롭다' 하면서도
아이를 '기관'에 보내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내 육아의 최대 난제는 '기관 보내기'였다.
나는 심지어 시댁과 친정에 하루를 온전히 맡겨본적도 없다.)
외로웠고, 두려웠기 때문에
힘들고 괴로워도
내 품에서 키울 수 밖에 없었다.
6살 2학기,
큰 아이를 '기관'이라는 곳에 처음 보냈다.
남들보다 훨씬 늦게 보낸 기관이였음에도,
내가 돌볼 수 있음에도
꼭 아이를 버리는 것 같아
죄책감을 떨치기가 참 어려웠다.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결국 유치원을 보내는 과정중에
겪는 여러 사건들 덕분에
결국 그런 감정들이 나의 두려움과
특별함이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편한 것에 대한 죄책감,
책임을 다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아이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나의' 외로움'이였다.
나의 '외로움'이
아이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 말은 '기관에 보내는 것'을
옹오하는 말도,
'기관에 보내지 않는 것'을
비난하는 말도 아니다.
보내고 안보내고는
결국 엄마의 '선택'일 뿐이다)
5살인 둘째 역시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나와 함께다.
사실은 올해 '기관'에 보내야지 하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코로나 덕분에(?)
아이를 좀 더 데리고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힘들지만
돌아오지 않는 이 시간에 감사하며,
오히려 독립이라는 시간을 거치는 내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주가 나를 위해 돌아가나' 라는 착각이 들정도로 모든 상황이 나를 배려해준다. 사실을 3월에 기관에 보내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도
왜 아이를 원에 보내지 못할까?'
애를 잘 키워서,
애랑 있는게 즐거워서,
애를 너~~~~무 잘 케어해서
데리고 있었다기 보다는
결국은 나의 두려움,
내면의 깊은 '외로움' 때문이였다.
결단할 수 없었던
나를 원망했던 시간,
원에 가지 않겠다는
아이를 원망했던 시간.
그리고 애 잘키우는 사람들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그 시간.
그 혼란과 위기의 순간들이
눈을 감으면 아직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시간을 통해서
'평온'하게 자란 아이들에게
감사가 올라온다.
'내 모든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안된다고 좌절했지만,
그 안에서 나는 또 얻을 것이 있었구나'
'나쁘고 좋은 것은 없구나'
'내 외로움에 붙잡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결국 '사랑'만 가져갔구나'
불안한 마음에
너무 꽉 붙잡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외로움의 상처 덕분에(?)
온종일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음이
돌아보니 감사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나와 아이들은 더 단단해졌다.
때론 소리까지 질러가며
아이들과 싸워댔지만,
그 역시 내게 다 필요한 과정이였으리라.
누군가는 나에게
지금까지 데리고 있는 것에 대해
'대단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나에게
'아직까지 미련스럽게 데리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지지고 볶으며 치열하게 육아했던 그 시간은
분명 내 상처에서 나온 줄기였지만,
그럼에도 그 상처가 있었기에
온전히 아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었다.
때론 내 상처가
아이들에게 '독'이 되기도 하지만,
그 상처를 넘어서겠다는 엄마의 의지는
(비록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아이들이게 결국 '사랑'으로 전해진다.
나쁘고 좋은 것은 없다.
잘하고 나쁜 것도 없다.
모든 것은 나의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형상임을.
'고통'은 내게
'다른 선택'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축복'은 고통을 견뎌낼 '힘'을 길러준다.
모든 것은 이유있게 흘러가고 있음을.
엄마보다 더 뛰어난 '사랑꾼',
두 아들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