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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Oct 15. 2021

'엄마'라는 껍데기 뿐이였던

막연한 삶 속에서 만난 더 막연한 존재


삶의 시간 속에서 

그저 익숙한 듯 나를 비난하고 자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꾸 자꾸 화가 올라왔다.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었고

끊임없이 나 말고 누군가는 알고 있을 것 같은

정답을 찾아 해맸다.


눈 앞에 놓여진 정답이 간절했다.

아이의 눈빛과 몸짓엔 노관심.

먹고 자고 싸는 그 행위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다.


다른 것은 도통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남들은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지, 그 노하우가 알고 싶을 뿐이였다.

나는 '잘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남들은 '나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을 것이기에,

그들이 알고 있는 육아의 정답이 너무 궁금했다. 


나의 삶이 '막연'했기에, 

아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내게는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막연하다 여겨졌기에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불행하게 느껴졌다.

막연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막연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것을 찾아헤메이던 도중 만난 것이 

바로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였다.


막연을 넘어선 심연.

그 심연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내게는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였다.

막막했기에 두려웠고, 두려웠기에 끊임 없이 더 혼자만의 세상에 갇히는 기분이였다.

깊은 웅덩이에 빠진채 살아간다는 느낌을 경험해본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쇳덩어리를 가슴에 품고 사는 느낌.

내게는 삶 자체가 고통이였다.


점점 늪으로 빠지는 듯한 느낌.

분명 나의 삶임에도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처럼 느껴졌다.

내가 내 삶의 주인 같지가 않았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도, 바뀔 수도 없다고 믿었다.


아무도 없는 타지.

신랑만 바라보며 키우는 아들이 하루에도 몇번씩 밉고 귀찮았다.

나의 삶도 책임지기 어려운 나에게

책임져야 할 존재 한 명이 생긴다는 것은

때때로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불행한 일이였다.


나 하나만 망쳐지면 충분하다고 여겼던 나의 삶.

그 삶에 아이라는 존재가 어느새 스며들어와 있었다.

아이가 미치도록 울 때 마다

아이의 아플 때마다

그것이 꼭 나의 탓인 것만 같아서 차라리 죽고 싶었다. 

'내가 엄마가 아니라면'.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야.'

허공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라는 사람이 아이를 망칠까봐 두려웠다.


때때로 아이가 있어서 참 행복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길지가 않았다.

행복하기 보다는 불안했고, 

그 불안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나는 점점 더 무기력해져야 했다.


행복이 내 품안에 들어와도,

들어오지 않아도 불안했다.

행복이 오면 그 행복이 언제 깨질지 몰라 두려웠고,

행복이 오지 않으면 그 자체가 나를 불행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아서 싫었다.


내게는 지나온 후회스러운 과거와

오지않은 미래의 대한 두려움 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에

현재라는 것이 없었다.


아이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나온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엔 눈을 감아버렸기에,

내 눈앞에 아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연한 일상 속에서

아이와 함께 손잡고 걸어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참 괴롭고 외로운 일이였으리라.


내게 과연 아이를 향한 마음이 있었을까?

지나와 보면 나는 그저 '책임'이 두려운,

그 책임을 면피하기위해 '엄마'라는 역할에 충실했던,

하나의 껍데기였을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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