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
위험을 무릅쓰고 삶의 속도를 거스르고 공간을 초월하여 살기로 작정한 그때부터 시작됐다.
나를 찾는 여정이.
그전에 내 삶의 모든 선택은 비교, 인정욕구, 종교적 신념, 두려움과 불안에 따라 결정됐다.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내린 선택이라 믿었지만 돌아보면 거기에 진정한 나는 없었다. 참 나를 모르니 내가 진짜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뭔지 몰라 늘 적당한 선에서 타협했다. 전공을 선택할 때도 이 정도면 취업이 어렵지는 않겠지, 회사를 선택할 때도 이 정도 대기업이면 어디 가서 꿀리진 않겠지, 이 정도 사회적 지위면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겠지 같은. 그러기에 위기가 찾아오면 원망했고 다른 선택지를 두고 후회했다. 그 학교에 안 갔더라면, 다른 전공을 선택했더라면, 다른 회사에 갔더라면, 아이를 늦게 가졌더라면. 다른 선택과 그로 인해 펼쳐질 다른 인생이 더 낫다는 보장도 없으면서 그 ‘만약에’라는 자기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상상의 미로에 갇혀 헤매곤 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첫째가 생기고, 두 살 터울로 둘째가 태어났다. 두 아이 모두 가려움증이 모기 100만 마리에게 물린 고통이라는 ‘중증아토피’를 네 살 무렵까지 앓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상 입은 피부처럼 살갗이 벗겨져 온몸이 시뻘건 상처와 진물로 덮였다.
어쩌다 외출할 때면 항상 시선이 집중됐다. 대형마트에서 유모차에 잠든 아이를 저학년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꼬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저기 봐, 괴물이야.”
지하철에서 아기띠를 하고 서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쯧쯧, 엄마가 임신했을 때 도대체 뭘 먹었길래.”
가려움으로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아이를 낮에는 종일 업었고,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밤새 긁어주느라 수면 부족으로 시달렸다. 대학병원을 주기적으로 다니며 스테로이드 연고를 매일 아이 피부에 발랐다. (부작용이 무서워 연속 3일만 바르고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독한 연고다.) 조금이라도 푹 재우기 위해서 항히스타민약을 매일 밤 먹이기도 했다. 먹거리, 잠자리, 씻기는 물, 바르는 로션, 입는 옷, 외출 장소 등 그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염증으로 힘들어하는 어리고 연약한 아이들을 보며 강해져야지 다짐하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 우울감에 휩싸였고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피로가 누적된 어느 여름밤, 아무리 정성껏 긁어줘도 아이는 밤새 징징대며 뒤척였다.
“제발 잠 좀 자라! 제발!”
긁어주던 손을 들어 아이의 등짝을 찰싹 내리치며 빽 소리쳤다. 엄마의 날 선 감정을 그대로 느낀 아이는 서럽게 울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엄마가 미안해’를 주문 외우듯 토해내며 아이를 품에 안고 함께 울었다.
아이들에겐 내가 24시간 필요했고 그렇게 나는 자연스레 경력 단절 여성이 됐다. 나는 없고 아픈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엄마라는 역할만 남았다. 그래서일까. 그 시절에는 유난히 더 후회하는 삶을 살았다. 등에 한 아이를 업고 앞에 다른 아이를 메고서는 화려한 여행 사진과 각종 성과로 도배된 동기, 동료들의 SNS를 몰아보며 느꼈던 허탈함과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아이들의 면역력이 자라면서 다행히 아토피와의 전쟁은 약화됐다. 하지만 과거를 후회하고 원망하며 시간을 돌리고 싶어 하는 나의 고질적인 습성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왜 나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과거로 돌아갈까?’란 질문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단 하나뿐인 그것도 찰나에 불과한 유한하고 고유한 인생인데 주체성을 잃고 끌려다니며 후회로 점철된 삶에 문득 진절머리가 났다.
그즈음 같은 아파트 24평에 살던 어린이집에서 사귄 엄마들은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넓은 평수로 옮겨야 한다며 30~40평대의 매물을 우르르 보러 다녔고, 아이들을 각종 학원에 등록시켰다. 짝지(신랑)는 과도한 업무와 승진의 압박 때문에 갑상선 항진증까지 얻고도 숨 가쁘게 가장 노릇 하느라 시나브로 메말라갔다.
그러다 일이 터지고 말았다. 고속도로에서 졸음 운전하던 트럭이 짝지가 운전하는 회사차인 ‘모닝’을 뒤에서 들이받았다. 폐차시킬 정도로 큰 사고였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짝지의 부상은 경미했지만 평소에 시달리던 목과 허리 디스크 지병이 악화돼 여러 번 수술을 거치며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이때다 싶었다. 앞만 보고 달리던 모든 걸 멈추고 떠날 타이밍이. 진짜 내가 누군지 탐험하며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볼 기회가. 그렇게 우리는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 교수도, 종교 지도자도, 건물주도, 연예인도 아닌 평범한 대한민국 노동자 부부인 우리가. 나는 프리랜서 일을 그만두고 짝지는 재활치료를 명분으로 육아휴직을 냈다. 적금 5000만 원을 깨서 미취학 아동 두 명을 데리고 어학연수를 핑계 삼아 무작정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그리고 익숙함을 벗어나 위험을 감수하고 공간을 넘나들며 살기 시작한 그 선택이 나의 무지를 깨웠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시멘트로 덕지덕지 발라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나의 참 자아가 꿈틀대는 걸 비로소 미세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했다. 그 선택이 몇 겹의 가면으로 덮여 있는 내가 아닌 진짜 나를 아주 천천히 발견해 가는 기나긴 항해의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