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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랑 Oct 16. 2023

프랑스 치유 일기-프랑스 초등학교 놀이 시간 사고

집에서 쉬고 있었던 어느 나른한 오후였다. 

첫째 아이의 담임선생님 번호로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한창 오후 수업이 진행되고 있을 시간에 담임 선생님의 전화라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으니 역시나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머리를 다쳐서 병원에 가야 하니 학교로 빨리 와달라는 것이다. 20시간 같았던 20분 동안 지하철을 타고 헐레벌떡 학교에 도착하니 아이의 옷은 피로 범벅이 돼 있었고 머리에 가까운 왼쪽 옆 이마에 멸균 거즈와 천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다. 눈물 자국이 꾸덕꾸덕하게 마른 것으로 보아 아이는 진정을 찾은 듯 보였다.


선생님에게 어찌 된 일인지 물으니 중간 놀이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놀이 시간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놀 때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감독하는데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운동장에 없었다고 한다. 아이가 피를 흘리며 감독 선생님에게 먼저 왔고 선생님들도 어떻게 사고가 난 건지 정확히 보지 못했다며 오히려 아이에게 물어봐달라고 하였다.


아이는 아빠와 함께 운동장에 가서 어떻게 다쳤는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친구들과 가방을 앞에 메고 서로 부딪치는 놀이를 운동장 구석에서 하던 중 뒤에 있던 친구가 확 미는 바람에 벽돌담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평소 아이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아이를 종종 못살게 굴던 친구였다. 담임선생님은 우리를 먼저 학교 근처 약국에 데려갔다. 약사에게 아이의 상처를 보여주고 응급실에 가야 할지를 물었다. 약사는 아이의 상처를 보자마자 봉합이 필수인 상처라며 병원에 즉시 갈 것을 권장했다. 선생님은 조금만 걸어가면 종합 병원이 있다며 이번엔 병원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가는 길에 어떻게 된 건지 아이의 이야기를 토대로 선생님에게 설명해 주었다. 놀다가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라 아이를 민 친구도 많이 놀랐을 거라고 말은 하였지만 속으로는 그 친구가 야속했다.


그 친구는 엄마가 한국인이라 한국말을 어눌하게나마 할 줄 알았다. 덕분에 선생님은 그 친구와 아이를 짝지어 주었다. 아이도 조금이나마 소통이 되는 그 친구를 많이 의지했다. 그러나 유치원을 갓 졸업하여 누구를 배려하거나 돌보는데 서툰 이 아이들은 성향과 결 또한 너무 달라 시도 때도 없이 부딪쳤다. 하지만 프랑스 말을 아직 잘 못하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을 자유롭게 사귈 수 없는 아이의 상처가 항상 더 깊었다. 그 친구와 어긋나기라도 할 때면 친구들이나 선생님 앞에서 자기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해 억울하고 답답하기까지 했다. 더구나 그 친구는 반의 다른 친구들과 유치원에서부터 함께 지내다 초등학교에 같이 올라왔기에 아이를 대체할 친구들이 언제나 많았다.


아직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초반에는 학교의 구조나 시스템을 모르는 아이가 그나마 한국말이 조금 통하는 그 친구를 따라다니니 그 친구는 아이를 귀찮아했다. “저리 가. 나 좀 그만 따라다녀!” 같은 말을 여러 번 뱉어내며 자존심이 유난히 센 아이의 마음에 타격을 가했다. 모자가 똑딱이 단추로 붙어있는 외투를 입고 가면 다른 친구와 합세해 모자를 후드득 잡아당겨 떼버리는 장난을 서슴지 않았다. 평소에 학교 이야기를 잘 안 하는 아이가 어느 날 통곡을 하며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한 적이 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그 친구가 하지 말라는 아이의 말을 무시하고 괴롭힌다고 털어놓았다. 이 이야기를 그 친구의 한국인 엄마에게 하니 오히려 그 친구는 아이에게 한 일을 기억조차 못 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이에게 사과하고 또 잘 지내는 거 같더니 아이가 또 어느 날 그 친구 하나 때문에 전학을 가고 싶다며 화나고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아이가 모자를 아예 떼버린 채 외투를 입고 다니는 걸 보며 그 친구가 계속 장난을 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이에게도 다른 친구들이 생겼고 아이가 스스로 헤쳐 나가기를 내심 바라며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1월부터 눈과 비가 자주 내리다 보니 억지로 모자를 붙여서 외투를 입고 다니게 했던 게 화근이었다. 안 입고 간다는 아이에게 친구들이 또 모자를 떼면 하지 말라고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그래도 계속하면 엄마에게 이야기하라고 타일렀다. 아이가 두려웠던 건 장난을 계속 치는 그 친구에게 맞서서 싸움에라도 휘말리게 되면 선생님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해 억울하게 혼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자를 떼고 다녔다. 그런데 엄마의 부탁으로 모자를 붙이고 다니는 바람에 장난이 다시 시작되었다고 했다. 프랑스 말을 잘하게 될 때까지만 참아주는 거지 프랑스 말만 잘하게 되면 복수해 줄 거라며 증오의 눈빛으로 이를 가는 아이의 말에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나는 즉시 담임선생님에게 상담 요청을 하였다. 하지 말라고 분명한 의사 표현을 했음에도 멈추지 않고 장난을 치는 건 명백한 ‘괴롭힘’ 임을 피력했다. 아이가 왜 그 친구에게 맞서지 못하는지 아이의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한 성향과 아이가 맞닥뜨리기 수치스러워하는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외투의 모자가 단추로 붙였다 뗄 수 있는 거라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 그렇지 않은 후드티의 모자를 잡아당겼다면 목이 졸릴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음을 강조했다. 선생님은 아이가 겪은 일과 고충을 이야기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충분한 대화를 통해 해결점을 논의했다. 선생님은 만약 그 친구와 다투는 일이 생기면 아이가 그림을 잘 그리니 그림을 통해 입장을 이야기하거나 몸을 이용해 이야기하면 어떻겠냐고 하였다. 그러면 선생님은 아이의 말을 먼저 들어주고 어떻게든 아이의 입장에서 도와줄 거라고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의 말을 믿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선생님에게 다가와 자신을 표현하는 걸 어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선생님은 그 친구를 포함해 아이가 거론한 또 한 명의 친구를 불러 면담했다고 한다. 그 친구들은 아이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이번에는 경고로 끝났지만 만약 똑같은 괴롭힘이 또 발생하면 그 친구들의 부모님을 학교로 부를 것이라고 선생님은 상담 다음 날 전해주었다. 그 친구의 한국인 엄마에게도 상황의 심각성과 그동안 참아왔던 아이의 감정을 알렸다. 그 후로 평화가 찾아온 듯하였다. 아이는 그 두 친구와 사이좋게 잘 지냈고 전학을 절대로 안 갈 거라며 학교가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예기치 못한 사고가 난 것이다. 가방 검사를 마치고 들어간 병원은 규모가 꽤 큰 종합병원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비가 부슬부슬 성가시게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대신 안팎으로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소아청소년과 응급실의 등록 절차를 도와주었다. 


평소에는 대기 시간이 길다는데 그날은 다행히 기다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선생님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 같이 기다려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하도 큰 병원이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도 못 하고 경황도 없을뿐더러 불어도 안 되는 우리를 위해 여기까지 데려다주고 등록까지 대신해 준 것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선생님을 돌려보냈다. 선생님은 아이가 용감하다며 칭찬해 주었다. 그렇게 20분을 기다리니 아이의 이름이 불렸다. 안내된 방으로 들어가 기다리니 레지던트와 인턴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와 여자 의사가 들어왔다. 다행히 영어를 잘하는 남자 의사는 아이의 상처를 보며 어떻게 다친 건지 물었다. 다친 경위와 장소, 시간을 듣고 아이에게 메스껍지는 않은지, 어지럽지는 않은지 물으며 상처 주변을 손으로 눌러 아픈 곳이 없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피가 범벅된 윗옷을 탈의한 후 침대에 누우라고 했다. 아이 몸 곳곳의 반사 반응을 확인하고 팔과 다리를 들었다 놓으며 꼼꼼히 체크한 뒤 상처 부위를 소독했다. 남자 의사는 여자 의사에게 이런 경우에 어떤 검사를 진행해야 하는지 낱낱이 설명하는 듯 보였다. 아이의 상처는 성형외과 의사가 봉합해야 하니 외과 의사 선생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친절하고 차분한 말투로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나는 자기 모습이 궁금하다는 아이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10분 정도 기다리니 젊은 성형외과 남자 의사와 여자 의사가 아까 봤던 두 의사와 함께 들어와 어떻게 다쳤는지 다시 물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는 마취하고 상처를 꿰맬 거라고 말하였다. 아까 소독해 준 남자 의사가 아이의 입에 마스크를 대고 가스를 주입했다. 잠이 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히 해주기 위함이라 설명했다. 순간 아이는 피식 웃으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외과 의사는 주사기로 상처에 마취하고서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벌어진 상처의 공간을 실로 이어가며 닫고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평소에 주삿바늘조차 똑바로 못 봐 아이들이 예방접종을 할 때면 고개를 돌려 피했던 내가 이 장면만큼은 어느 하나 놓칠세라 긴장된 마음으로 의사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이는 통증을 전혀 못 느끼는 거 같았고 나를 바라보며 계속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보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거 같았지만 애써 웃으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봉합을 마치니 1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의사는 10일 동안 운동하면 안 되고 30분 후에나 음식물 섭취가 가능하다는 주의 사항을 알려줬다. 실도 저절로 녹는 실이라 병원에 다시 안 와도 된다고 하며 인사를 하고 나갔다. 처음에 만난 레지던트 의사는 아이에게 잘했다며 마스크를 선물로 주었다. 선물을 받고 신이 난 아이는 의사 선생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씩씩하게 건넸다. 아직 마취가 덜 풀린 아이는 주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며 흥분 띤 어투로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다며 커서 의사가 되겠다고까지 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축구선수와 과학자가 되겠다는 아이에게 이제 의사라는 꿈까지 더해진 것이다. 신나서 조잘대는 아이를 보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수납하려고 수납처에 갔더니 병원 비용 고지서는 집으로 보낸다고 하였다. 학교에 의무로 가입해야 할 보험은 들어놨지만,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지 걱정되었다. 일단 치료는 잘 받았고 급한 불을 껐으니 그걸로 충분하다며 우리 부부는 서로를 위로했다. (병원비는 추후 학교에서 알아서 처리했다.)


집에 와서 숨을 돌리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아이가 괜찮은지 묻는 선생님의 문자가 와있었다. 선생님에게 연락해야겠단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먼저 연락해 준 선생님의 사려 깊은 마음이 고마웠다. 

매우 아팠을 텐데도 이 모든 상황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해맑게 웃는 아이를 보니 더 크게 안 다쳤다는 사실에 감사가 나왔다. 자칫하면 눈을 다쳤을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로 다친 게 기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을 겪고 나니 아무 사고 없는 평범한 하루가 선물이요, 기적이라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런 기적의 순간들을 거저 받는 우리네의 인생인데 누구를 탓하며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말자란 생각이 스쳤다. 인간의 삶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나날을 불안 속에 사는 건데. 그 속에 나도 있고 너도 있는 건데. 뭔가 알 수 없는 공동체 의식과 동질감을 느끼며 아이를 다치게 한 친구가 용납됐다. 그 아이 또한 내 아이와 마찬가지로 기적이 필요한 소중한 존재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 친구나 그의 부모에게 느꼈던 원망과 언짢은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져 갔다. 상처가 아플 때마다 그 친구의 탓으로 돌렸던 아이도 이건 분명한 사고였고, 누구나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을 이해하고 더는 그 친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다음 날 그 친구 엄마에게 사고 소식을 전해 줄 때는 그 친구도 놀다가 모르고 그런 거라 많이 놀랐을 거라고 더구나 피도 많이 봐서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으니 위로해 주라는 진심 어린 걱정이 우러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 친구는 죄책감 때문에 말도 못 꺼내고 있다가 엄마 아빠가 번갈아 가며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재차 추궁하니 처음엔 다른 친구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밀었다고 거짓말을 둘러대다 나중엔 자기가 그런 거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 엄마는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일부러 부딪치거나 미는 행위는 위험하니 다시는 하지 말라고 그 친구를 포함한 모든 학생에게 말했다고 아이가 전해주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그 친구는 아이와 더 가까워진 듯 보였다.

타국에서 겪은 한껏 가슴을 쓰려 내려야 했던 첫째 아이의 사고가 훗날 아이에게는 어떤 식으로 기억에 남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내 아이 얼굴에 평생 남게 될 흉터를 준 그 아이나 그 부모를 향한 날 선 검 대신에 내 아이가 경험한 기적을 선물 받은 하루로 남게 되어 감사하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기적 같은 삶을 산다. 그리고 내일은 내일만큼의 기적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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