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Mar 14. 2017

하지만 우리의 감정도 간단히 방향을 알 수 있다면

오늘이 오기 전에 남겼던 수많은 깜박이들의 자취를

  사회에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평소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우울해지고 신경질이 나게 한다. 이를테면 지방의 어머니가 보내주신 마늘장아찌의 병을 따지 못해서 짜증이 나고,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을 때 돌아가고 있는 환풍기 소리를 들으며 끄지 않지 않고 외출한 자신에 대해 한없이 미련함이 든다.


  헤어짐 후에 오는 것이 바로 그렇다. 어떻게 보면 사람과 사람이 헤어졌다고 간추려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별이 사랑의 끝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관계가 끝이 났을 뿐이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이별 전에 이미 사랑이 끝났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이별 후에도 여전히 사랑이 지속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의 끝은 알 수 없다. 사랑의 원리라던가 이별의 폭력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더라도, 우리는 그 두 현상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다시 복잡한 감정의 변화를 만나고 만다.


  - 차선 바꿀 때는 깜박이 좀 켜.


  여자는 남자에게 자주 말했다. 남자는 왼손으로 잡고 있던 핸들을 신경질적으로 탁- 쳤다. 여자는 이미


  - 자기야, 차선 갑자기 바꾸면 뒤차가 놀라겠다. 깜빡이 켜는 게 좋지 않아?

라고 말하기도 했고


  - 지금 앞차가 깜박이 안 켰다고 그렇게 욕하면 어떡해. 자기도 종종 잊잖아.

라고 달래기도 했다. 남자는 종종 잊는 게 아니라 아예 켜질 않음에도 불구하고.


  - 사고 날 뻔했잖아!

라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남자에게 방향지시등을 켜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종종 생각했다. 여자가 차를 끌고 나오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 키.

라고 말했다. 


본인이 여자의 차를 운전하겠다는 뜻이었다. 여자의 차를 몰 때, 남자는 더 험하게 운전을 했다. 칼치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속도를 내 끼어들기도 했다. 여자의 차가 남자의 차보다 좋기 때문도 있을 거다.


  그래서 여자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남자는 이유를 물었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가 답을 했고 남자는 신경질을 부렸다. 마찬가지로 차 안에서였다.


  - 방향지시등 안 켰다고 헤어지자는 거야? 그깟 깜박이 안 켰다고?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안전벨트를 풀며 대답했다.


  - 응, 맞아. 그게 이유야.


  - 세상에. 네가 내 뒤차에 탄 것도 아니고 무슨 그깟 걸로 화를 내고 헤어지자고 해?


  - 나 더 이상할 말 없어. 너도 지금 이거 나 붙잡으려는 것도 아니고 사과하려는 것도 아니잖아. 먼저 갈게.


  여자가 내리고 남자는 한참을 서있었다. 그리고 한강 주차장을 빠져나와 차를 몰기 시작했다. 평소와 비슷한 속도로 달렸으나 차선을 바꿀 때면 방향지시등을 넣었다. 남자는 점멸하는 붉은 불빛들을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오늘이 오기 전에 남겼던 수많은 깜박이들의 자취를. 알아채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보지 못한 척 했던 오늘의 신호를.

매거진의 이전글 한밤의 오로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