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서른 전후 인생의 전환점을 거치며,
삶의 방향이 좋은 쪽으로 키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쪽이라는 것은 괜찮은 사람을 만나거나, 일이 잘 풀리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꽤 오래 멈춰 있었기 때문에 어느 방향이든 걷기 시작한 것에 좋은 의의를 두는 것이다.
대부분 그렇듯,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이게 맞는 것인가'
'나는 잘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일부터 삶 전체에 던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자답은 언제나 ‘잘 모르겠다’였다. 어쩌면, 언제나 상대적 삶의 정규분포 바깥에 위치해 있는 환경 혹은 성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거나 일을 시작하고
그렇게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는다.
그리고 보통 내 자녀의 자녀가 자녀를 낳기 전에
우리의 삶은 마무리된다.
이를 테면 인생의 가이드라인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가이드에서 일정 범위 이상 벗어나게 되면 보통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는 모두가 잘 아는 것들이다. ‘이제 일 해야지’, ‘이제 슬슬 결혼해야지’가 대표적이다.
본인의 뜻이 확고하거나, 주변 환경이 좀 더 관대하다면 이 범위는 없거나 넓어진다. 하지만 나와 당신, 우리 대다수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대부분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왔다.
일정 범위를 벗어날 때마다 자문했다.
‘괜찮은 걸까’,
‘이게 맞는 걸까’
하지만 질문의 답은 타인에게서 찾곤 했다. 다들 이때쯤 뭘 하고, 이 정도면 뭘 가지고 하는 것에 비교해 본인의 위치를 가늠한다.
이것은 당연하기도, 자연스럽기도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인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어느 기점을 지나며 내 반골 기질 다분한 성향이 어우러지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괜찮지 않으면 안 되나?'
‘맞는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친구는 술자리에서 아파트 이야기를 꺼냈다. 뭐 흔히들 하는 어디 아파트가 떨어졌고, 어디는 아직 건재하고 뭐 그런 이야기들. 오래된 사이기에, 친구가 매매계획이 없음에도 시세를 꿰고 있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친구는 언제나 주류이길 원했다.
그래서 일을 막 시작할 무렵엔 대기업의 성과를 꿰고 있었고, 수도권에 대한 로망을, 그리고 지금은 부동산을 시세를 알고 있다.
이런 생각 또는 행동은 맞고 틀린 시시비비를 가릴 문제는 아니다. 다만, 언젠가 친구는 적당한 때에 적당히 남들처럼 하지 않으면 뭔가 ‘실패’ 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친구와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불안 혹은 두려움 같은 것은 우리에게 확고한 자아가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정말 원하는 것과 주변의 환경, 이해관계 등에 엮여서 하지 못하는 것. 여기서 저울질은 항상 후자로 기울어져 있다.
가족도 딱히 큰 공간도 필요 없는 내가 ‘국민평수’라고 하니까, ‘보통’ 그렇게들 하니까 매매하는 것은 어떤가?
가족이 더 생길 것이니 좀 더 큰 집을 매매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가?
난 이 차가 너무 이쁜데, 30대가 끌기에 준중형은 좀 그렇다는 의견은 어떤가?
20대인 내가 여유가 넘쳐서 컨버터블을 끄는 것은 어떤가?
앞서 말했듯, 우리는 결코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이상적인 방향이라면 아마도 우리의 관용도가 좀 더 넓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정말 원하는 것과 원하는 척하고 있는 것의 차이를.
그래서 평균에서 좀 치우쳐진 나는 질문한다.
‘정말 내가 온전히 원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