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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비관주의

by 이주인

언제부턴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사실 나는 별 볼 일 없는 놈이며 내 인생은

지금과 같이 계속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는 걸


어린 시절, 나는 세상이 놀이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면 소위 말하는 ‘좀 나가는’ 사람이었냐 하겠지만, 그런 세상에 살진 못했다. 다만, 노력하면 그게 무엇이든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늦은 새벽 독서실에서 수능 공부할 때도, 노트에 명언과 다짐을 써가며 세상으로 나가는 포부를 밝히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게도, 근성은 있으나 딱히 현명하진 않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목표달성은 못했어도 스코어 하이는 찍었다는 적당한 만족감으로 20대를 시작했다.


이후 20대 후반에 접어들기 전까진 꽤나 긍정적이었다. 적당히 운이 좋다고 믿으며 결과에 대해선 기대보다는 괜찮았다고 안도하며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적당히 잘 될 것이며

내 인생은 머지않아 더 잘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살았다.


ChatGPT Image 2025년 5월 17일 오후 04_36_55.png




이후,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며 삶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며 그제야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있던 손가락이 조금씩 열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20대의 마지막과 30대의 시작은 생의 전환점으로 자리 잡았다.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우리의 삶은 드라마와는 다르다. 적어도 내 삶은 그렇다.


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마지막까지 함께 취업의 문을 두드렸던 친구는 내게 자신의 예전 모습이 보인다고 말했다.


친구는 꽤 냉소적이다.

미래에 대한 긍정보다는 부정을, 인생의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까웠다. 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기보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다는 말이다. 타인에게는 친절했다.


친구는 트러블을 만들지 않기에, 꽤 반대 성향을 가진 나와 크게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내가 같잖은 이상을 말할 때도 딱히 긍정이나 부정하지 않았다. 가깝게는 지내지만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 친구가 자신의 모습을 봤다고 했을 때, 나는 동의하진 않았으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제 나는 긍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긍정이라 생각했던 생각 혹은 마음가짐이,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멍청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주사위를 던지며 언제나 6이 나오길 기대하는 것은 요행이다.


술에 취해 너는 뭘 해도 잘 살 것이라 말한 친구들의 말이나, 입사를 강권했던 대표님의 어딜 가도 크게 될 친구라 칭찬하시던 그 말들.


그 모든 말은 결국 내 인상이나 얄팍한 언변, 어쩌면 당신들이 보기에 그저 그런 내가 좀 더 잘 살길 바라는 마음에 던진 사소한 연민이었음을.


눈을 가렸던 손을 내렸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무조건적인 긍정적 사고방식에서 아무것도 되지 않는 염세주의를 지나, 내가 멋대로 붙인 제목과 같이 ‘긍정적 비관주의’ 정도가 되겠다.


노력은 하지만 그게 최고의 결과를 가져다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생은 앞으로도 이렇게 흘러가겠지만,

나름대로의 최선은 다하겠지만

그럼에도 잘 못된다면

그냥 좀 아쉬울 뿐.


그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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