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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

by 이주인

어린 시절부터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아, 이것은 내가 생을 저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죽음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 혹은 두려움이었다.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일곱 살 즈음이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라 희미하지만 한번 꺼내 본다면 이렇다.




어느 저녁 큰 이모 집 작은방,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딱히 사유라는 것이 없었을 어린 내가 받아들인 죽음의 의미는 ‘정지’였다. ‘무엇일까’라는 생각의 정지, 지금 이 밤에서 눈을 뜨고 내일 아침으로 영원히 넘어갈 수 없는 순간, 어두컴컴한 그 무엇.


이후 꽤 긴 시간을 살아오며 지금도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이야 손 닿을 곳에 무한한 세상이 펼쳐져 있어 ‘가만히’ 있을 일은 없다. 하지만 옛날 사람인 내 어린 시절은 그런 별천지가 없었다.


그래서 TV처럼 딱히 몰두할 게 없을 때는 눈을 감든 뜨든 가능한 머릿속 무한한 세계를 펼치곤 했다. 이러한 잡념 혹은 사색은 어쩌면 우주의 끝이나 깊은 바닷속 어딘가처럼 상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에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TV 혹은 인터넷 뉴스가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올 시기부터 비슷한 부류로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계속 거론되는 것을 보았다. 유명 연예인의 극단적 선택, 통계 집계상 OECD 1위 같은 것들.


이런 기사는 자연스럽게 친구들과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가볍게는 내가 꽤 좋아했던 사람이었다는 안타까움으로, 조금 진지하게는 과연 ‘선택’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야기가 퍼져 나간다.


생명의 정지를 택한 사람들은 병인가,

아니면 본인의 의지인가?


예전에는 이것을 ‘병’이라기보다는 본인의 ‘나약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썩 어울리는 비유는 아니겠지만 그것은 마치 읽기 지루한 책을 덮어버리는 것, 숨이 차올라 달리기를 멈추는 것. 당연히 삶은 이처럼 멈췄다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는 것.




그 이후, 구체적으로는 이십 대의 끝 무렵을 기점으로 이 생각은 좀 달라졌다. 아니, 달라졌다는 것보다는 경험적으로 좀 더 잘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럴만한 배짱도 용기도 없고 삶에 대한 갈망 또한 크다.


하지만 나름 인생의 하락기를 맞던 시기에 이런 생각을 잠깐 해보았다. 삶은 꽤나 고통이고 그렇다고 생을 저버리고 싶진 않다. 하지만, 이를 테면 어떠한 이유로 내 삶이 얼마나 남지 않았다면 그냥 처연히 받아들일 수 있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생의 경험치가 높아질수록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생각은 조심스럽다. 어쨌거나,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기 그 상황은 내게 있어서 그저 까지거나 베이는 일종의 사고였다.


물론, 눈에 띄지 않고 스스로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던 이 정신적 상처는, 언젠가 자연스레 적당히 잘 아물었다. 이후 나는 자살은 결국, 건전지가 다 닳아갈 때쯤 늘 교체되던 일종의 프로세스가 고장이나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는 뭐 그런 느낌으로 보고 있다.


죽음에 근접한 사람들이 생의 전환기를 맞는 것처럼 와닿지는 않는다. 가끔 내일 당장 내 세상이 사라진다는 가정으로 오늘 더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책망하는 도구, 그쯤이다. 그저 앎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내 관심 분야 중 하나일 뿐이고, 우연한 계기로 좀 더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다.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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