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5
친구 한 명과 근교로 짧게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온 토요일 오후였다. 이 친구와는 대학을 마치고 알게 된 사이다.
정확히는 사회에 던져졌으나 생산활동은 하지 못하는, 어느새 우리에게 익숙해진 취업 ‘준비생’ 시절에 만난 인연이었다. 각자 일을 하며 타 지역에 있다가 같은 지역으로 오게 되어 가끔씩 보는 술친구가 되었다.
굳이 술친구라고 하는 이유는 보통 전화가 오는 이유의 80~90% 이상이 술 한잔하자는 연락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 제안에 기꺼이 응하는 것은 타지에서 딱히 술친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생이 차오를수록
가까운 사이도 조심스러워진다.
“아 가족이랑 같이 있겠지”, “아기 때문에 못 나오겠지”, “바쁘겠지” 등. 이럴 때에 비슷한 처지의 친구가 있다는 건 괜찮은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친구는 보통 ‘오늘은 진짜 술이 한잔 마시고 싶다’ 정도의 느낌이 아니면 술자리를 강권하진 않는다. 다만, 넌지시 연락을 하거나, 슬쩍 돌려가며 ‘내가 술이 한잔하고 싶은데’라는 뉘앙스를 풍겨주면 내가 ‘술 한잔 어때’라고 회신이 필요 없는 제안을 하며 일정이 맞춰지는 것이다.
그래서 연락이 온 전 날도 별 일이 없었으면 저녁에 만나 술이나 마시며, 사는 이야기나 하며 그렇게 휴일 저녁을 지울 예정이었다. 가끔이라고는 해도 루틴처럼 되어버린 이 일과가 좀 싫증이 났던 내가 “야 날도 좋은데 어디 한 바퀴 돌고 오자”는 제안에 친구가 응했던 것이다.
딱히 술을 먹자는 말은 안 했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친구는 오전 일찍 하루를 시작했어도 이대로 하루를 마무리하긴 아쉬운 마음을 내비치고 그 바람에 응답하여 주말이니 저녁 겸 한잔하자고 말했다.
서로 강요하는 사이가 아님에도, 이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면 언제나 서로 꽤나 취해 마무리하곤 한다. 최근에 둘 다 만족한 로바다야키에서 두어 시간 남짓 양껏 먹고 마시며 자리를 나섰다.
언제나 1차로 끝나지 않는 술자리라 어느 정도 양을 조절하지만, 이 날은 꽤나 허기가 졌는지 평소와 다르게 배가 불렀다. 그래서 2차는 좀 가볍게 마실 요량으로 최근에 새로 생긴 것으로 보이는 맥주집에서 2차를 시작했다. 몸속에 차오르는 알코올의 농도에 따라 가벼운 직장 스트레스에서 좀 더 관념적인, 그래봐야 개똥철학인 생각들을 안주로 곁들인다.
그렇게 기분 좋게 취해 2차를 마무리하고 계산대로 향하는 길. 우리는 암묵적인 룰로 서로 번갈아 가며 1차를 먼저 사는데, 이번에는 친구가 1차를 샀으니 2차는 내 차례다. 사장님께 카드를 건네고 결제를 기다리는 데 어찌 된 일 인지 포스기가 먹통이다.
적잖이 당황한 듯한 모습에 뭔가 처음 가게를 운영하시는 건가 싶은 느낌이 들었다. 사장님은 몇 번씩 기기를 껐다 켜시고는 담당업체와 통화를 하셨다. 술이 올라 느긋해진 우리는 널찍이 떨어져 시답잖은 수다를 떨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결제가 되고 별일 없이 친구와 가게 밖을 나섰다. 잠시 뒤 알람에 확인한 메시지는 어째서인지 결제가 취소되어 있었다. 친구에게 말하고 가게로 돌아가 사장님께 사실을 알리고 다시 결제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얼큰하게 취해 편의점 의자에 앉아서
“33만 원이었으면 그냥 갔겠지”
라고 웃으며 말하자 친구는 말했다.
“야, 1초도 안 망설이고 돌아갔어."
"33만 원 이어도 돌아갔을걸?"
뭐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가 꽤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던 시절, 조금 이른 등굣길 학교 계단 조금 떨어진 곳에 지폐 몇 장을 우연히 발견했다. 아무도 없었고, 얼핏 보기에 천 원짜리 몇 장이었기에 적당히 양심을 내려놓고 주워가면 그만이었다.
혼자 주울 용기는 없고 찾아줄 책임감도 없던 나는 머리를 쓰기로 했다. 친구가 오는 순간 같이 가는 척하며 자연스레 시선을 유도하는 것. 순조롭게 반 친구 한 명과 떨어진 돈 앞에 섰다.
내 용기 없음에 비해 친구의 행동은 단순했다. 바로 천천히 주머니에 돈을 넣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횡재’ 보다는 상황 자체에 대한 웃음이었다. 그렇게 친구와 나는 초등학생에겐 적잖은 몇 푼을 서로 나눠가졌다.
뭐 어쨌거나, 친구의 말을 듣고는 딱히 착한 사람은 아닌 나는 그저 술김에 인심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뒤이어 뿌듯함보다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
언제부터인지 정직하고 착하게 살면 손해만 본다고 생각하곤 했던 나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에게 말했다.
“야 우린 아무래도 성공하긴 틀린 듯”
“그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