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 방안 곰팡이와 마주하며 든 생각
부모님과의 관계 악화로 겪게 된 갑작스러운 독립은 뜻밖의 사건의 연속이었고, 예상만큼 험난했다. 좋지 못했던 상황의 나를 선뜻 거두어주었던(?) 룸메이트와는 나중 가서 관계가 무너졌고, 곧 또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그렇게 지금은 오롯이 혼자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로 인해 화에 잠식되는 시간이 줄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더 많은 시간 집중할 수 있게 된 점은 좋았다.
그래서 혼자 살면 다들 속 편할 거라 생각하지만, 가끔은 양팔이 저리게 외롭고 혼자 하는 모든 일들이 힘에 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날들은 책을 읽으면 나아졌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나 자신과 잘 놀기 시작하면 그 끝이 무뎌져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보다 내 시간을 크게 앗아갔던 것은, 결국 또 '화'였다.
최근의 큰 화는 지난 8월 지긋지긋한 장마철 덕분에 방 안에서 초면을 맞게 된 '곰팡이'였다. 곰팡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번식했고 방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어질러진 방 때문에 우울감에 휩싸이기 싫어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방청소를 바지런히 했다. 그런데 눈앞에 곰팡이라니, 그것은 강한 현타로 다가왔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르더니 그동안 독립했던 과정이 필름처럼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문제가 생기면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빨리 해결하려고 한다. 문제를 빨리 종결시키면 빨리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문제를 성급히 종결하려 할수록, 다음 문제를 곧바로 당사자에게 내보냈다. 마치 내 독립의 과정처럼. 결국 인생은 문제 덩어리이며 평생 완벽하게 풀리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고서야, 곰팡이를 노려보던 눈에 힘이 풀리면서 마음이 진정되었다.
8월 한 달간 락스를 네 번은 뿌린 것 같다. 뿌려서 없어지면 비가 내린 다음 날 또 번식해있었다. 9월이 된 지금은 습기가 많이 누그러져 더 이상 다시 퍼지진 않지만, 곰팡이와 사투를 벌이던 락스 자국이 핏자국처럼 연하게 남아있다. 집주인 아주머니께 곰팡이를 마주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말씀드려 확인시켜드렸더니, 내 과실이란다. 입주한 첫여름 내내 틀지도 않은 에어컨 중심으로 곰팡이가 퍼진 게 두 눈으로 훤히 보이는데... 억울했다. 그래도 날이 선선해지는 9월 말에는 벽지를 새로 해주시겠단다.
웃긴 건 벽지를 새로 하고 나서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꿨는데, 새 번호를 잘못 눌렀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 날 결국 반차를 쓰고 수리 기사님을 불러 9만 원을 지불하고 문을 뜯었다. 이미 곰팡이에 화가 너무 나서, 이번엔 화도 안 났다. 그저 나 자신에게 어이가 없어서, 그날은 여러 번 내 이마를 탁 하고 쳤다.
이 이야기는 다음날 주인아주머니가 내 방에 찾아와 5만 원을 쥐어주고 감으로써 나름 따뜻하게 마무리되었다. 아무래도 2020년 8월은 마가 꼈었나 보다. 직장생활도 그때가 너무 힘들었고, 오래간만에 했던 연애도 짧게 끝이 났고, 내 방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문제를 성급히 해결하려는 것은 오만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인생에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에 크게 화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한여름 곰팡이 덕분에 나의 발화점은 일도쯤 더 높아졌다.
혼자 산다는 것은 혼자서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하고, 슬픔, 우울, 분노를 잘 다뤄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다. 하지만 나는 그만큼 내가 남을 소모하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좋다. 반대로 남 역시 나를 함부로 소모하지 못한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혼자 지낼 생각은 아니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어느 누군가의 멋진 말을 가슴 깊이 품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지금을 귀하게 여기기로 했다. 분명 후회할 것이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그때의 자유가 좋았다고. 그때 내가 하고자 했던 일들을 더 시도해보고, 더 사색하고, 더 감상할 걸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