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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태원 Taewon Suh Nov 19. 2016

프린스와 두 자줏빛 보석

Wendy & Lisa

현대 비즈니스의 한 가지 중요한 추세는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Team이 기본적이고 중요한 단위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산업사회에서 비즈니스에 대한 팀 중심의 과정은 창의성을 중시하는 음악과 영화와 같은 문화콘텐츠 산업을 통해 가장 먼저 전형화되었으며, 이제 거의 모든 산업군에서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대중음악의 구체적인 역사를 들여다보면 여러 밴드의 이야기를 통해서 창의/생산의 단위로서의 팀의 다양한 특성에 대한 풍부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를 이루는 팀의 다이내믹스는 복잡합니다. 대개의 외부 이해관계자들은 표면에 나타나는 모양만을 보겠지만, 실제로 표면 밑의 팀 내부의 구조는 기대 이상으로 복잡하며 표면의 모양을 통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2016년 4월 21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 프린스는 80년대 이후 대중음악에 상당히 큰 영향을 남긴 뮤지션입니다. 미네아폴리스의 사이키델릭한 자줏빛 왕자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 자줏빛 향기는 아직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Purple은 보라색보다는 자주색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보랏빛 향기는 강수지...) 프린스는 자신이 상징색이 주는 뉘앙스만큼이나 신비롭고 독특한 천재 아티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아주 효율적인 팀 운영자였습니다.


프린스가 살았던 미네아폴리스의 Paisley Park: 상상과 달리 회사 건물처럼 심심한 외형입니다. 물론 내부는 아니죠.  


프린스는 그의 음악 경력을 통해 여러 밴드를 운영했습니다. 본인의 backing band였던 The Revolution, The New Power Generation, 그리고 3rdeyegirl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이너리그 밴드였던 The Time과 The Family, 그리고 본인 레이블 휘하의 여러 밴드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인 Lisa Coleman과 Wendy Melvoin은 1979년부터 1986년까지 프린스의 backing band였던 The Revolution의 멤버로 처음 알려진 뮤지션입니다. 키보드 주자이자 보컬인 Lisa Coleman은 1980년 Dirty Mind 앨범부터 참여하였고, 기타리스트이자 보컬인 Wendy Melvoin은 1983년의 Purple Rain의 레코딩부터 팀에 참여하여 1986년 팀이 해체될 때까지 활약하였습니다. 웬디의 쌍둥이 자매인 Susannah는 당시 프린스의 여자 친구이기도 했지요.

이 둘을 특별히 언급하려는 것은 그들만큼 프린스의 discography에 짙은 흔적을 남긴 프린스 휘하 밴드의 멤버는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워낙 능력 있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프린스인지라 어떤 밴드 멤버가 계속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스타일을 남긴다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웬디와 리사는 어려서부터 친구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더 이상의 개인적인 관계는 여기에서 생략하지만, 유아 시절부터 평생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드문 듀오입니다. The Revolution에 가입한 시기에 둘은 모두 아직 스물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둘의 아버지가 다 프로페셔널 뮤지션인 음악 가족에서 태어난 고로 이미 틴에이저 때 수준급의 연주 실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지요.


리사가 먼저 미네소타 토박이 위주의 프린스의 투어 밴드에 유일한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가입하게 되고, 1999 앨범의 투어가 끝난 후 기타리스트였던 Dez가 종교적 이유로 팀을 떠나자 웬디가 가입하여 둘은 다시 뭉치게 됩니다.


이 둘은 밴드 내에서 사운드의 중심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편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들의 영향은 프린스의 앨범 중 특히 Around the World in a Day, Parade, 그리고 레볼루션의 해체 후 발매된 Sign o' the Times 앨범에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Parade 앨범에는 두 사람이 Sometimes It Snows in April과 Mountains의 공동 작곡자로 기록되기도 합니다.


1986년 롤링스톤지 커버에서의 웬디와 리사, 그리고 프린스


프린스는 음악적으로 천재였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키워낸 미네아폴리스의 음악적 환경과 자원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지략가였습니다. 많은 젊은 아티스트와 같이 일했는데요. 예를 들어, 그가 거느리고 있던 The Time의 멤버였던 Jimmy Jam과 Terry Lewis는 Jannet Jackson, Human League, Robert Palmer 등과 같이 일하면서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를 풍미한 프로듀서가 됩니다. 8, 90년대 미국 미네소타 미네아폴리스의 대중음악 scene은 그야말로 프린스의 왕국이었지요.


프린스는 1982년 발매된 1999 앨범의 백커버에 처음으로 The Revolution이라는 밴드명을 기입했고, 그 이후의 세 앨범은 Prince and the Revolution의 이름으로 발매되었습니다. "Prince"의 이름으로 나온 앨범과 "Prince and..."의 이름으로 나온 앨범은 분명히 차이를 보입니다. 단순한 투어 밴드가 아니라, 밴드 멤버의 뚜렷한 기여가 있기 때문에 이름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Bruce Springsteen and the E Street Band 그리고 Tom Petty and the Heartbreakers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 대중은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탐 페티를 솔로 아티스트로 인식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밴드의 내부에서 그들은 기대보다 더 동등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The E-Street Band가 각각 따로 Rock'n Roll Hall of Fame에 헌액 된 경우처럼, 이러한 관계가 외부에서도 인정을 받기도 합니다.


한편, 웬디와 리사도 레볼루션에서의 활동 시 분명히 프린스를 보스가 아니라 동료이자 친구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Rolling Stone intervew, 1986). 순수하거나 혹은 순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린스는 아마도 동등한 파트너라는 개념조차 전혀 생각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법적으로 볼 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추측컨대, 말은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음악적으로 뛰어나고 자신의 방향을 잘 이해하는 고용인을 원했겠지요. 팀에 속한 것으로 만족하고 자신의 작품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그런 밴드 멤버 말입니다.


멤버 간의 기대가 다를 때 팀에는 문제가 당연히 생겨납니다. 프린스의 강한 카리스마로 인한 레볼루션 팀 내의 불만은 인기도에 비례하여 점점 그 수치가 상승하게 됩니다. 사적인 관계까지 엮여 갈등은 점점 쌓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웬디의 쌍둥이 자매인 수잔나가 (보스 여자 친구의 위엄으로) 레볼루션의 정식 멤버로 슬쩍 끼어듭니다. (웬디 왈, "내가 얘랑 엄마 뱃속에서도 같이 있었는데 밴드에서까지 같이 있어야 돼?") 어쨌든 프린스는 보스였고, 마침내 1986년 10월에 그 둘을 해고하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그 통고가 처음에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불만의 토로는 당연히 동료 간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들이 참여했던 미발매곡들이 프린스의 이름으로 발매되는 것을 보고서야 (Sign o' the Time), 그들은 이미 다가온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게 될 수 있었습니다. 후회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버스는 떠났습니다. 프린스는 원맨밴드가 가능한 천재 뮤지션이었고, 간단한 계약으로 그 둘을 대체할 인력은 주변에 넘쳐났습니다. 프린스는 솔로 앨범을 몇 장 발매한 후 1991년에 Prince and the New Power Generation을 결성하여 새 피를 수혈합니다.  


Prince and the New Power Generation


레볼루션을 떠난 후 웬디와 리사는 바로 듀오를 결성하여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경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첫 싱글 Waterfall을 통한 활동을 보고 프린스는 좀 더 공격적인 프로모션이 필요하다고 슬쩍 비평했다지요. 웬디와 리사는 성향상 showmanship 보다는 craftmanship에 관심을 갖는 뮤지션들입니다. 프린스의 사후에는 레볼루션을 재결성하여 추모 투어도 한 바 있습니다.   


웬디와 리사가 레볼루션이 있었을 시기가 프린스로 있어서도 가장 창작력이 왕성했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프린스가 레볼루션과 함께 만들었던 앨범들의 음악적 다양성을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흑인 뮤지션 중 가장 많은 백인의 팬을 소유했던 프린스의 음악에 백인의 정서가 더욱 깊게 배어졌던 것은 바로 웬디와 리사의 기여라고 생각합니다.


The Revolution


그들이 프린스와 좀 더 오래 작업할 수 있었다면 어떤 음악이 나왔을까요? 게다가 워너 브로스와의 90년대 이후 18년간의 긴 소송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떤 음악을 더 들을 수 있었을까요? 개인적으로 프린스 혼자의 작업물보다는 뉴파워제너레이션과 프린스의 작업물을, 그보다는 레볼루션과 프린스의 작업물을 훨씬 더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가끔 해보곤 하는 상상입니다.


아무리 뛰어나도 개인보다는 팀이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지 못하는 팀은 팀이 아니라 조직일 뿐입니다.



*Title Image: Prince


[Paisely Park] by Prince and the Revolution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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