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루 Aug 04. 2021

5주동안 호캉스하고 느낀점

생활은 책임을 수반할 때 더 윤택하다

대만의 남부도시 타이난에서 5주간의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타이베이로 돌아왔다.

대만에 온지 이제 만으로 4개월이 됐는데 그중 1/4에 해당하는 시간을 그곳에서 지냈다.

다시 돌아온 타이베이가 완벽하게 익숙하지 않을 만도 하다.


타이베이에 돌아온 것은 여러면에서 의미가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의미는 호캉스가 끝났다는 점이다.




호캉스의 끝


호캉스가 끝났다는 것은 새로운 생활이 시작됐다는 말이다.

그 생활인 즉슨 내 삶에 수반되는 가장 기본적인 노동과 자원을 손수 책임져야하는 생활이다.



호캉스의 삶이 어땠는지 부터 설명해야할 것 같다.

참고로 장기간의 호캉스는 지인찬스를 사용해 누릴 수 있었다. 내 돈이 아니ㄷ


아침에 눈을 떠 레스토랑으로 내려가면 조식 뷔페만찬이 펼쳐져있다.

가지각색의 음식 중 구미에 맞는 것을 골라 방으로 가지고와 아침수업을 들으며 틈틈히 먹는다.

수업이 끝나고 하우스키핑을 콜한 뒤, 라운지에 올라가 다과를 먹으며 쉰다.

약 한시간 뒤 방에 들어가보면 티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리되어있다.

방 한쪽 구석에 모아둔 쓰레기는 모두 수거되고 방의 온갖 물품 뿐 아니라 침대시트까지 새것으로 재구비되었다.

빨래는 빨래가방에 넣어두면 몇시간뒤 뽀송한 옷으로 배달해준다.

호텔에 상비된 각양각색의 열대 과일을 먹으며 놀다가 출출할 때 쯤, 미식의 도시에 걸맞는 다양한 맛집 음식을 어플로 주문한다.

배달이 도착해도 서둘러 내려갈 것 없다. 로비에서 나를 대신해 음식을 받아주기 때문이다.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실컷 올림픽 경기를 보다가 저녁때가 되면 로비에 전화해 저녁을 주문한다.

마지막 열흘은 핫소스가 일품인 후라이드 치킨만 먹었다.

그 후 빵빵한 인터넷을 이용해 일을 좀 하다가, 24시간 돌아가고있는 에어컨의 온도를 조절하고 잠자리에 든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모두 해결이 된 삶.


모두의 생활에는 그저 숨쉬고 살아가는데 대한 기본적인 책임이 붙는다.

내가 사용하는 것 만큼, 생활하는 그 만큼, 모든 것에 노동과 자원이 소요된다.

타이난에서의 호캉스는 그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호캉스를 하며 지낸 5주간 약간의 무력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처음 몇주는 행복했으나 점점 손하나 까딱하기 어렵고 생산적인 루틴을 행하기 쉽지 않았다.

밖에 나가서 이곳저곳 다녀볼 만한 흥미도 떨어졌다.

마치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 문을 닫고 있는 것 같았다.



심신이 릴렉스 되다 못해 무기력에 닿은 것일까.

해야하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 힘이 충전되는 줄 알았더니 오히려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었다.




인간이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노동이 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장을 보는 노고. 하물며 음식을 사러 나가는 노고.

나로 인해 생긴 어지러움을 처리하기 위해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노고.


이 노고들은 신이 인간에게 '삶'이라는 선물을 주면서 함께 건낸 처방이었을지 모르겠다.

이정도는 움직여야 생활의 긴장감과 기력을 유지할 수 있다~ 하는 보조제 같은 거 말이다.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던 노고들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었다는 것을.

역설적이게도 아무런 부담이 없는 삶을 몇주간 경험해보면서 알게 되었다.



작년부터 생활에 대한 책임들이 '루틴'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부담보다는 즐거움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헌데 생활이 겹겹이 쌓이면 관성이 생기기 마련이듯 가끔 버겁다 느낄 때가 종종 있다.

5주의 호캉스를 통해 이후 대만에서의 남은 평범한 삶을 지탱할 힘을 다시한번 인식할 수 있었다.


내 몸뚱아리는 내가 책임져야한다는 적당한 부담감.

템포를 유지해야한다는 적당한 긴장감.

그리고 릴렉스.


멈추지 않는 추 마냥 그 중간 어딘가를 계속 왔다갔다 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타이베이에서의 삶은 타이난에서의 그것보다 다시 고되질 거다.


끼니에 맞춰 누가 밥을 준비해주지 않으니 장을 봐다가 요리를 하거나 음식을 사러나가거나, 배달시키고 때에 맞춰 밖에 가지러 나가야한다.

과일이라도 먹을라치면 신경써서 마트나 과일가게에서 과일을 사와야한다. 과자도 내돈주고 사와야한다.

일주일에 한번 쓰레기를 모아서 쓰레기차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들고 나가 버려야한다. 요일마다 분리수거가 달라서 신경써야한다.

며칠에 한번씩 빨래도 돌려야한다. 대기하고 있다가 다돌린 빨래 시간에 맞추어 빨래를 꺼내 건조대에 널어야한다.

매일 저녁 방을 쓸고 닦아야한다. 바닥에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하기에 매일 방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에어컨을 만수르처럼 마음대로 틀지 못할 거다.

생활용품도 아껴가며 사용하게 될거다.


그래도 난 이곳에서 더 활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

호캉스의 삶을 통해 알게된 점 한가지가 더 있는데

바로 행복한데 낯설지 않았다는 것.


고민끝에 부모님과 떨어져지내기 전까지 나는 이른바 '호캉스'다운 삶을 살고 있었다는 생각에 닿았다.


끼니 때에 맞춰 밥이 제공되는 삶.

빨래와 청소가 학교다녀오면 해결되있는 삶.


그러다 처음 가족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을 시작했을 때 느꼈던 '당연함'의 부재가 문득 떠올랐다.


마치 타이난에서의 5주간 호캉스를 마치고 타이베이로 돌아와 느낀 감정과 유사하다.

내 평생 2/3의 시간동안 무조건적인 호캉스를 제공해준 부모님께 깊고 깊이 감사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학생이 되어 9월을 맞이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