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바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밖을 모른다.
그러나 더 오래 조직을 들여다보면,
진짜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아무런 변화가 필요 없는 조직이라는 믿음.
우물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물의 깊이도, 벽의 높이도, 떨어지는 빛의 각도도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개구리들은 말한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문제는 없다.”
“굳이 흔들 이유가 없다.”
그 말은 사실이다.
우물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개구리들은 굶지 않고,
물은 아직 썩지 않았다.
그래서 변화는 ‘필요 없는 것’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물 밖을 알고 있는 생명체 하나가 들어온다.
그는 말한다.
“바다에서는 물이 흐릅니다.”
“고이지 않기 때문에 썩지 않습니다.”
“여기와는 다른 방식으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물 안에서는
그 말이 문제를 만든다.
왜냐하면 그 순간부터
아무 문제없던 우물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개구리들은 불편해진다.
지금껏 만족스럽게 살아왔는데,
왜 갑자기 비교를 해야 하는가.
왜 굳이 더 넓은 세계를 상상해야 하는가.
변화는 결핍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론을 낸다.
“우리는 변할 필요가 없다.”
“저 생명체가 문제다.”
“괜히 불안을 퍼뜨린다.”
그리고 생명체는 배척된다.
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존재가
‘아무 변화도 필요 없다’는 믿음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직의 역설이 드러난다.
변화가 필요 없는 조직일수록
변화를 가장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변화가 없다는 말은
이미 최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버틸 힘이 없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직은 말한다.
“우리는 안정적이다.”
그러나 그 안정은
움직이지 않음에서 오는 안정이지,
움직일 수 있음에서 오는 안정은 아니다.
바다를 말한 생명체는
조직을 살리려 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가능성을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조차
우물 안에서는 위협이 된다.
결국 조직은 선택한다.
변화를 제거함으로써
변화가 필요 없다는 증거를 유지하는 길을.
그리고 다시 고요해진다.
문제는 없다.
불편함도 없다.
질문도 없다.
하지만 고요함은
건강의 증거가 아니다.
그저 아직
물이 완전히 썩지 않았다는 신호일뿐이다.
아무런 변화가 필요 없는 조직의 가장 큰 역설은 이것이다.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조직은
이미 변할 수 없는 조직이 되었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지 않는다.
우물은 오늘도 안전하다.
그리고 그 안전함 속에서
바다는 영원히 이야기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