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구왕 서영> 첫 북토크를 기념하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걸로 먹고사는 건 오랜 꿈이었다. 문제는 두 개 다 가지기가 정말, 피똥 싸게 힘든 일이라는 걸 잘 몰랐다는 거다. 세상에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 그런 가르침을 주려는 듯 대학을 졸업할 때쯤에 별안간 취업을 준비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애초에 어린 시절부터 내가 좋아하던 일이라고는 도무지 돈이 되지 않는 일이었고, 그러다 보면 그 일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여전히 그 생각에 큰 변화는 없다.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를 가장 편하게(?) 풀 수 있는 건 약속된 월급을 받는 거다. 적어도 내 조건에서는 가장 빠르게, 확실하게 나를 먹여줄 수 있는 건 회사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간 후 먹고사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기 시작했다. 우선 ‘먹고사는’이라는 단어에서 단어 ‘먹고’와 ‘사는’을 떼어 놓고 봐야 한다. 막연하게 ‘먹고사는’을 뭉뚱그려 하나로 생각했었지만, 막상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워낙 복잡해서 먹는 문제와 사는 문제는 또 다른 층위의 개념이라는 걸 사회생활을 하면서 적어도 먹는 문제로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 때쯤 깨닫게 되었다. 먹는 문제는 고정적인 월급을 받기만 해도 대부분은 제법 빠른 기한 내에 해결되지만, ‘사는 문제’는 그렇게 쉽게 뚝딱 해결되지는 않는다. 제때 먹이는 것 외에 챙기고, 돌봐야, 사는 건 가능하다. 사람의 동기, 의지, 감정이란 게 전원을 꽂고 버튼을 누른다고 바로 굴러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기계가 아니기에.
한참을 먹고사는 문제에서 ‘사는’은 빼고 ‘먹는’에만 초점을 맞춘 삶을 살았었다. 비싸고 좋은 걸 먹이고, 입히고, 소비하는 삶. 먹는 문제만 어떻게 잘 해결해도 사는 건 그런대로 굴러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 보니 먹는 건 해결할 수 있어도, 사는 문제는 혼자 해결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걸 보고, 요즘 다들 간다고 하는 곳에 가고, 심지어 일 년에 꼬박꼬박 한 번 이상은 어느 나라로든 떠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여행도 가야 할 것 같아서 가고. 사는 법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있다 보니 여기저기 줏대 없이 취향까지 흔들렸다.
<피구왕 서영>은 그런 줏대 없이 흔들리던 취향과 가치관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다. 마구 흔들렸던 과거를 다시 세우는 과정이자, 망설였던 옛날이 아쉬워서 뒤늦게나마 대리만족을 하려고 만들어낸 이야기다. 작년 가을, 독립출판으로 먼저 내고 어쩌다 보니 더 넓은 세상으로 책이 나갔다. 전국 매장에 책이 깔리는 건 분명 예상치 못했던 큰 사건 이건만, 책이 나온 첫날, 그리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실물로 본 그날에야 조금 감흥이 있었지 사실 아주 큰 울림이 있지는 않았다. 그건 아마 책이 나온 그 순간 이제 이 이야기는 내 손을 떠났고, ‘다 끝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 책이 내 인생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는 냉정한 판단, 그러니까 ‘먹고사는 문제’를 이 책 하나가 해결해주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슬프지만)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럴 때는 나의 냉랭한 이성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아니, 좀 좋아할 일에는 충분히 좋아해도 되지 않나.
어쨌든 나의 냉정한 성향(?) 때문에 첫 소설집이 기성 출판사와 계약하여 출간된 그날 그 순간에도 나는 그렇게 ‘이런 기쁨 하나에 취하면 안 된다고, 정신 차려!’라며 스스로 뺨을 때리며 ‘다음’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 스스로 냉정해질 정도로 글쓰기는 사실 먹고사는 문제와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좋아서 하는 일은 될 수 있어도 먹고사는 일이 될 수는 없는 그런 것. 그런데 뜻밖에 첫 북토크를 끝낸 밤, 먹고사는 게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 별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 당장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먹고사는 문제가 이미 조금씩 해결되고 있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을 직접 대면하는 건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즐거운 방법이다.
글은 독자가 있어야 책이 되고, 가격표를 단 책은 읽어주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판매부수의 증가속도도 비례하여 가파르게 올라간다. 물론 타이밍, 마케팅 비용, 운 등등등… 수많은 변수가 그 사이를 끼어 들어가지만, 본질은 독자의 반응이다. 단순한 정신승리나 꿈이 아니라, 이건 경험에 기반한 확신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일단 만족을 표하는 어떤 집단이 있다면 조금씩이라도 독자가 늘어난다. 속도가 얼마나 빠르고 더딜지, 그건 아무도 짐작할 수 없지만 누군가가 잘 읽었다는 응답을 보내면, 신기하게도 또 누군가가 그 응답에 답변을 한다. 그게 지난여름부터 겨울까지 <피구왕 서영>을 세상에 두 번 내놓으면서 깨달은 바다. 그리고 아직도 글을 쓰고 완성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무엇보다 쓰는 사람이 재미있어야 읽는 사람도 재미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과정까지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그래서 앞으로 글을 쓰다가 불안해질 때면 첫 북토크에서 본 얼굴들을 떠올리려 한다. 특히 좋아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글 쓰는 일이 슬슬 재미없어진다고 생각될 때, 그때 글을 완성해가는 즐거움에 무뎌진 나의 감각을 다시 예리하게 만들 수 있는 건 독자뿐이기에. 내가 쓴 글을 누군가 읽어준다는 건, 그리고 심지어 읽고 난 후 감상을 공유해주는 사람들의 얼굴을 직접 보는 건 기분이 요즘 말로 말. 잇. 못이니까. 조금 더 진지하게 표현하자면, 내가 만든 세계에 누구라도 들어와 주길 바라면서 누구라도 오긴 오려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있었는데 기꺼운 마음으로 흔쾌히 들어와 준 사람들을 만나는 반가움이니까. 그만하고 싶을 때마다 그날 본 얼굴들을 떠올리면, 다시 그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라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