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2019년이라고요?
2018년이 끝났고, 곧 2019년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딱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회사에 다닐 때는 연말이면 종무식이 있었고, 연초에는 시무식이 있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1년 치 업무에 대한 성적표인 고과를 받았고, 조직개편에 따라 인사이동이 있기도 했다. 그렇게 조직에서는 1년을 주기로 시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어떤 장치가 반드시 있었다. 소속이 없으면 이렇게 흔히들 느끼는 인생의 리듬감을 남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올해 처음으로 깨달았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리다보니 연말을 맞이한 각종 모임 사진, 여행 사진, 그리고 올해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과 소회를 정리한 글로 도배되어 있었다. 다른 이들의 반짝이는 순간을 휴대폰으로 염탐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이렇게 하루가, 이틀이, 연말이 흘러가버리면 나중에 조금은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남들의 화려한 일상을 구경하다가 새해를 맞이하면 “거봐, 그때 뭐라도 하지 그랬어.”라며 나중에 또 자책할 것만 같았다. 그때 강민선 작가의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라는 책에서 읽었던 퇴사에세이가 떠올랐다.
익숙한 ‘나’를 ‘그녀’로 낯설게 만들기
“도서관에서 보낸 좋았던 모든 순간이 영화의 장면들처럼 그녀의 기억을 훑고 지나갔다. 그만두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기분을 그녀는 오래오래 아주 깊이깊이 느꼈다. (중략)
그때 그녀는 알았다. 이 감정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앞으로 언제라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고 그때마다 자신은 단독자가 되어 세상과 맞서는 기분으로 자신의 감정을 겨우 추슬러야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강민선,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던 작가는 퇴사한 후 한 편의 에세이를 쓴다. 흔히 ‘나’라는 1인칭으로 기술하는 일반적인 에세이의 시점과 다르게 자신을 ‘그녀’로, 3인칭으로 두고 한 편의 소설 같은 글을 써내려갔다. 3인칭의 효과였을까. 이 에세이에는 ‘나’를 화자로 한 글에서 흔히 빠질 수 있는 부담스러운 자기연민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나약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도 자기연민에 빠져있지 않고, 아픔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그 자리에서 마침내 빠져나오기 위해 애쓰는 한 사람의 모습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 한 편의 글에 담겨있었다. ‘나’를 ‘그녀’로 치환해서 글을 쓰다 보면 나 역시 내가 보낸 시간을 조금 더 객관적이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너무나 익숙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나를 낯설게 만들기 위해. 그래야만 연말에 불안해진 마음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기술 셋, 비교는 어제의 나하고만.
늘 그렇듯 “써야지!”하고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글이 술술 써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를 주인공으로 한 글을 하나 쓴다는 건 그 자체로 민망함과 느끼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야말로 ‘손, 발이 오그라드는’ 행위였다. 내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워서 나의 조각 중에서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 가까운 친구들을 ‘그녀’로 치환한 이야기부터 쓰기 시작했다. 역시 나와 유사한 정신적 DNA가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쓸 수 있었고, 친구들은 고맙게도 글을 좋아해 줬다. 여럿의 이름을 빌려 ‘2019년의 OOO’이라는 제목으로 몇 편의 짧은 이야기를 쓰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친구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쓴 글이기도 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나를 위해,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넣어서 쓴 자기중심적인 글이기도 했다는 것을. 2018년의 마지막 날쯤에 그 사실을 깨닫고, 친구의 이름을 빌리는 대신 ‘2019년의 황유미’라는 제목으로 마침내 짧은 글을 쓸 수 있었다. 아직도 손, 발이 오그라드는 증상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일부만 살짝 공개해본다.
"그녀는 이제 남들과의 비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보려고 퇴사 직후 글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메모했던 노트를 펼쳐 든다. 퇴사 후 글 쓰는 태도에 관해, 그리고 생활 태도에 관해 스스로 했던 몇 가지 다짐이 메모 되어 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문장이 있다. ‘비교는 어제의 나하고만 한다.’ 맞다, 이게 나였지. 갑자기 그녀는 최근 연말을 맞이해 인스타그램을 통해 본 다른 이들의 화려한 생활에 움츠러들었던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언제나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 남들과 비교를 할 시간에 ‘나’라는 존재에 대해 한 번이라도 더 고민하는 것. 그게 바로 그녀가 자기 자신을 이루고 있는 부분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워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