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유미 Nov 15. 2019

혼잡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기술 넷, 혼잡(job)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소속 없이 혼자 일하기 시작한지 7개월차, 운 좋게도 독립출판으로 낸 책을 통해 한 출판사와 인연을 맺었고 독립출판물 <피구왕 서영>이 기성출판의 세계로 나간지도 어느덧 한달째다. 사계절이 다 지나기도 전에 너무 큰 일이 벌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지인들에게는 그간 나에게 벌어진 큰 일을 설명할 때마다 꼭 남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많은 일이 너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몇개월간 벌어진 일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되어있었다. 


결과야 어떻든 회사를 나간 후 일단 빠르게 뭐가 되어서일까, 퇴사꿈나무들에게 간혹 이런 질문도 받곤 한다. “그게 돈이 돼?” 가슴에 손을 얹고 당신이 지난 1년간 돈을 주고 샀던 책이 몇권인지 떠올린다면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금방 깨달을 것이다. 대부분 이런 질문 뒤에는 조직 밖에서도 잘 먹고 잘 사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는 간절함, 혹은 조직에서 버티는 게 가성비가 최고라는 걸 한번 더 확인하고 싶은 열망이 동시에 보인다. 어느 쪽이건 비난을 할 수 없고 이해가 가는 게, 회사를 다니면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짜 망하면 나 뭐 먹고 살지? 하는게 사람 마음이고 나 역시 그런 사고의 궤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답은 로또 뿐!) 결국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느냐의 문제다. 선택을 앞두고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또 나중에 다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할 나를 위해 소속 없이 혼자 일하는 혼잡(job)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솔직하게 적어두려 한다. 아주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지만.


혼잡(job)의 가장 큰 기쁨은 자율성이다. 일의 시작과 끝, 과정까지도 거의 모든 게 내 손에 달려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한시간 정도 하다가 그만하고 놀고 싶을 때는 놀아도 된다. 회사일과 비교했을 때 글쓰기는 정반대의 속성을 지닌다. 시작도 내 마음, 끝내는 것까지 내 마음이다. 문장을 시작해서 마침표를 찍기까지 타인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게다가 정직한 일이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던 것들을 손가락으로 옮기다보면 뭐라도 된다. ‘뭐라도’라는 표현이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일단 시작해서 끝까지 버티다보면 결과물이 나온다. 앉아서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이면 흰 화면이 가득차기 시작한다. 매일 채우면 이야기가 되고 책이 된다.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보낸 시간만큼 거짓없이 나오는 결과물을 볼때면 희열을 느낀다. 매번 신기하다. 와, 내가 진짜 글을 썼네?  


시작부터 끝까지 하고 싶은대로, 내 방식대로 해볼 수 있다는 점은 너무나 달콤하지만 동시에 입안에 넣자마자 형체 없이 금세 사라지는 솜사탕처럼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기쁨이기도 하다.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끝까지 하는 게 어렵다. 어렵게 끝까지 하더라도 결과물에 대해 확신하기가 힘들다.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혼자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각자 쓴 글을 가지고 모여 합평을 하는 모임을 한다고해도,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어느 순간 깨닫는다. 아무리 여러 의견을 경청하고 취합해본다고 해도 피드백을 받아들일지 말지 판단하는 건 결국 내 선택이고,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는 것을. 회사처럼 진행상황을 공유하며 같이 돌다리를 두드려줄 동료를 찾는다는 게 근본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말이다. 일의 시작부터 끝, 결과물에 대한 컨펌까지 1인이 모두 책임지는 시스템이다보니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스스로 해결해야한다. 글을 쓰는 일에 어떤 요령이 있을리도 없다. 이처럼 쓰는 일은 수입의 불안정성을 떠나 일의 속성 역시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 불안을 견디는 곧은 심지가 좋은 글을 쓰는 작가들이 지닌 가장 큰 재능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리베카 솔닛은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 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며,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또한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매우 친밀하지만, 지극히 외롭기도 한 그 행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쓴다는 건 결국 어쩔 수 없이 단절이 필요한 행위가 아닐까. 자신의 인생을, 때로는 다른 이의 인생을 빌려 훌륭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들을 오랫동안 동경해왔다. 또한 작품 뒤에 숨은 작가의 민낯을 궁금해한적도 있었다. 이제는 어쩌면 그들은 불안을 견디면서 작업을 끝까지 하는 데에도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하기 때문에 외부로 더 쏟을 힘이 없어서 그렇게 은둔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섣부른 상상을 하게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역시 선택의 결과다. 혼자 시작해서 마무리하기까지 외로움과 끝없는 불안을 견뎌서 작업물을 만들게 되면 마침내 결과물을 통해 수십명, 혹은 수백명, 어쩌면 동시대를 함께하지 않은 언젠가 만나게 될 불특정다수의 사람에게까지 가장 ‘나 다운 방식으로’ 말을 걸 기회를 보상으로 얻게 된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중략)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 것 아닐까? 그것이 둘만으로 구성된 관계일지라도. 말이 전하기에 실패한 것을 글이, 아주 길고 섬세하게 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물론 불안을 견뎌 마침내 말을 걸 기회를 얻는다고 해도 돌아오는 반응이 좋기만 할리는 없다. 비평은 대중의 권리니까. 또 한국의 소비자들은 특히 냉정하니까. (괜히 영화, 뷰티 등 소비자 반응이 중요한 업종에서 한국이 테스트베드로서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겠는가!) 그래도 또 마음에 들면 불같이 애정표현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꼭 말을 걸어봐야한다고 얘기하고 싶다. 이유없이 내 글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나니까.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 있다.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게 중요하고, 제일 중요한 건 버티는 것. 그 무엇보다도 ‘버티기’를 최상위목표로 놓고 생활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더 버티지 않고 뛰쳐나와버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쓰는 일은 열심히하고 싶은 일이자 잘하고 싶은 일,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하고 싶은 일이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다. 내가 이 글을 카페에서 쓰고있는 지금도 작업실에서, 카페에서, 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작업을 하고 있겠지. 이 말이 들릴리는 없겠지만, 오늘도 버티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

이전 04화 일기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