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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유미 Mar 13. 2019

쉽지 않아, 쉽지 않지.

지난 주말에 만난 친구와 나눈 이야기에서 건진 말은 '쉽지 않아'다. 친구는 뭐든 쉬운 일이 없다고 말했다. 쉽지 않다니, 세상에 이렇게 어른스러운 표현이 있을까. 살면서 여러 결정을 앞두었을 때 내 마음대로, 오롯이 내 의지대로만 선택할 수 없고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감을 느낀다. 나이가 들수록 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상상력은 점점 구체적이고 어두운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 눈 앞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감안하면서 결정을 내리는 건 그야말로 쉽지 않다. 특히 현재의 삶을 바꾸는 결과를 낳을 큰 결정은 더더욱 쉽지 않다. 결정을 내린 후에는 또 무슨 일이 닥칠지 예상하기도 쉽지 않다. (라임 맞추기도 쉽지 않다!)


오늘도 쉽지 않은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맥북 키보드와 터치패드가 말썽이라 큰 맘먹고-글 쓰겠다고 카페로 가는 것을 제외하고 나의 외출에는 정말 '큰 마음'이 필요하다- 서비스센터를 방문했다. 그런데 담당 직원분이 만지자마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게 아닌가. 양치기 소년이 된 것 같은 민망함에 "이게 일주일 동안 말썽이었는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접수는 취소하고 평일 낮에 홍대까지 나왔는데 그냥 들어가기에 아쉬워 영화를 예매했다. 통신사 포인트로 예매하니 현명한 소비를 한 것 같아 어깨가 으쓱거렸고, 상영 시작 시간까지 남은 한 시간도 현명하게 보내고자 역시 통신사 제휴 카페인 던킨도너츠를 갔다. "포인트를 이미 사용하셔서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점원의 표정에 내가 다 미안해져 커피와 도넛 값을 황급히 계산하고 자리를 잡았다. 아메리카노에 설탕 맛 진하게 나는 글레이즈 도넛의 조화는 환상이었으므로 비록 포인트 결제는 아니었지만 만족스러웠다. 수리기사 분의 마법으로 멀쩡해진 키보드를 두드리며 잠깐 글을 쓰면서 마셨던 커피는 정말이지 돈이 아깝지 않았다. 노트북이 다시 괜찮아졌다는 안도감에 신나서인지 글도 빠르게 술술 나오는 것 같았다. 와, 오늘은 정말 많이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뭐든 쉽지 않다.


영화 <캡틴 마블>을 잘 보고 다시 글을 쓰려는데 또다시 키보드와 터치패드가 말썽이었다. 맥북이 정신을 차린 거라고 방심했던 탓에 써두었던 글은 저장도 하지 않았는데. 속으로 읊조렸다. 역시 쉽지 않아. 결국 맥북은 수리센터로 다시 가서 진단을 맡겨두었고, 이 글은 작은 휴대폰으로 어찌어찌 기억을 복원해서 쓰고 있다. 다시 글을 쓰면서 결론적으로 오늘 단 하루만 해도 예측했던 일 중 대부분이 다르게 흘러갔고, 예정에 없었던 일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채웠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도 돌고 돌아도 결국 알았던 바, 짐작했던 바대로 사건은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것도. 고장 난 기계는 어쩌다 잠깐 정신 차리더라도 결국 고장 난 게 맞으니 고쳐야 하고, 내가 공짜로 먹고 마시고 향유하는 것들은 어쩌다 한 번이지 매번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니고, 그러니까 어쩌다 찾아오는 행운에 너무 즐거워해서도 안 된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뭐 하나 쉽지 않은 가운데 할 수 있는 건 일단 사건을 만들고, 제자리를 찾아갈 때까지 두고 보는 것이다. 두고 보는 것도 쉽지 않지만.


+캡틴 마블 재미있어요.

++아이클라우드 만세, 백업 만세. 유비무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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