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대별로 정직하게 변하는 감정 곡선에 대하여
요즘 내 감정 곡선은 시간대별로 정직하게 하강한다. 그러니까 하루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오른쪽 아래로 고개를 떨구는 형태에 가깝다. 아침에 일어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과 기대감에 휩싸인다. 알람을 듣고 바로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침대에서 조금 늘어져 있다 보면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 두 몸은 가뿐하고, 당장이라도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진다.
운동을 하거나 책을 조금 읽다가 점심을 챙겨 먹고 외출을 한다. 요즘 날씨는 또 얼마나 좋은지. 따뜻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카페로 출근하는 길에는 발걸음이 가볍다. 이때쯤 나는 섣불리 오늘 하루를 점친다. “와, 오늘은 진짜 글이 술술 나오겠는데? 많이 쓸 수 있겠는데?” 딱 6시가 되기 전까지 이 산뜻한 기분 그대로 집중해서 오늘은 목표 분량을 다 채워보자고 다짐한다. 기분을 그래프로 표현하자면 이때쯤 늘 최고점을 찍는다.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유난히 햇살 좋은 날에 바깥에 있으면 무턱대고 긍정적인 감정이 생긴다.
카페에 도착해서 마실 것을 시키고 자리를 잡고 파일을 열면 그때부터 슬슬 정체구간이 찾아온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경기도의 한 위성도시에서 경상남도 창녕시에 있는 할머니의 집까지 자주 아빠의 차를 타고 경부고속도로와 국도를 타고, 때로는 잘 뻗은, 때로는 구불구불하게 꺾인 길고 긴 길을 내려가곤 했는데 그때 느꼈던 답답한 감정과 비슷하다. 먼 길이라는 것도 알고, 가는 길은 처음만 설레지 재미보다는 인내에 가깝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자꾸 “아, 언제 도착하지? 아직도 멀었어?”하며 스스로 닦달하게 된다.
이런 감정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고 이내 “어떻게든 끝내고 싶다.”라는 위험한 생각으로 몰아간다. 이러다가 한 바닥도 못쓰고 오늘 하루를 날려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일단 뭐라도 써보자고 키보드를 두들긴다. 이때는 사실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라, 글자를 타이핑하는 행위에만 집중하는 단계다. 그리고 이때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렇게 쓴 글, 그러니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든 분량을 채우기에 급급해서 갈겨쓴 문장은 퇴고 단계에서 다 삭제할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흰 화면을 하루빨리 채운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든 끝낸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노력은 들이지 않고 일이 끝나기만을(그것도 ‘잘’ 끝나기를 내심 기대하며) 기다리겠다는 뜻인데, 다른 일이면 몰라도 글쓰기에는 전혀 적용될 수 없는 모순된 문장이다. 한 편의 글이 끝나려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하고, 그걸 제대로 표현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읽어봐도 스스로 납득이 가야 한다. 그런 과정이 생략된 글은, 글쎄, 적어도 내 생각에는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든’이라는 무책임한 단어가 글이 한편 탄생하기까지 끼어들 틈은 없다는 것이다.
오후 두 시에서 세시 경, 카페에 도착한 지 약 한두 시간쯤 지나간 시점부터 “뭐라도 쓰자.”라는 무책임한 마음으로 쓴 글은 결국 삭제하게 될 거라는 끔찍한 미래를 상상하자 기분 곡선은 정직하게 아래를 향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썼던 글을 냉정하게 읽어보면 다 버려야 한다는 걸 의미하고, 다시 시작하는 게 맞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 안의 불성실하고 게으른 자아가 튀어나와 “어차피 오늘은 망했어!”라며 소리를 친다.
이럴 때 선택이 필요하다. 정말 오늘은 망했으니까 놀던가, 아니면 “아니야, 아직 망하지 않았어!”라고 성실하고 바른 자아의 목소리로 누르던가. 둘 다 해봤는데 오늘 망했다고 놀아버리면 훗날 더 힘든 시간이 기다린다. (벼락치기도 그렇잖아요?) 그런데 아직 망하지 않았다고 저녁 6시까지 붙잡고 있어 봐도 뭐가 나오지는 않는 날이 더 많다. 그러니까 어느 쪽을 택하건 저녁 6시 이후부터는 급격히 기분 곡선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친다. 저녁 넘어 밤늦게까지 글을 붙들고 있는 건 최악이다. 너무 빨리 질려버려서 나중에 퇴고를 할 기력이 남지 않게 되니까. 그러니까 어쨌든 선택을 하고 저녁 때면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 다음 날을 위한 에너지를 남긴다. 읽고 싶던 글을 읽고 영화나 드라마를 본 다음에 멍 때리기를 하다 보면 이번에는 바닥이 아니라, 그 아래로 뚫고 들어가려 한다. “오늘 대체 뭘 한 거지?”
그럴 때는 그냥 자야 한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하루 중 가장 기분 좋은 시간이 오니까, 이런저런 의문이 들 때는 잠을 잔다. 망한 하루에 대한 자괴감도 불 끄고 이불 덮고, 눈꺼풀을 닫아 잠을 청하면서 밀어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아무것도 안 한 것 같다는 자괴감이 들 때는 ‘잠, 빵, 밥, 카페인’ 이 네 가지 중 무엇이 빠지지는 않았는지 챙겨보아요. (오늘 저는 빵을 챙기겠습니다)
+커버 이미지는 https://nourzikra.com/blog/why-its-necessary-for-a-writer-to-not-write-sometimes/ 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