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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n 05. 2019

푸른 나부(裸婦)_01

단편소설집

 ►제목은 앙리 마티스, 1907년 作 <푸른 裸婦>에서 따옴.       


 1.

하늘의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문득 생겨난 눈송이들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는 수은등의 푸르스름한 불빛 속에서 어지럽게 날리다가 몇 번인가 가볍게 솟구쳐 오르고, 마침내 사뿐히 내려앉았다.

몇 초 동안 전기가 나갔다가, 형광등의 안정기들이 일제히 낮은 소리로 울리면서 불이 들어왔다. 비로소 그녀는 창유리에 기대었던 이마를 떼었다. 이마와 닿았던 만큼 성에가 지워진 채 창은 부옜다. 왜 창에 이마를 대고 있었던가, 고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눈은 화실로 들어올 때부터 내렸다. 내리는 눈에 이끌려서 창가로 온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마른 수건을 발견하고 나서야 창문에 서린 김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창을 닦으면 갑갑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거라고 그녀는 기대했던 것이다. 화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니 형광들의 푸드덕거림 속에 언뜻 창유리가 모두 부옇게 흐려진 것을 보고 그녀는 견디기 힘든 유폐감에 사로잡혔다. 오후 내내 비워둔 공간에서 끼쳐 오는 더운 공기가 역하게 느껴져, 마른 수건을 들고 서둘러 창가로 왔다는 것을 그녀는 기억해냈다. 그러나 눈송이 하나하나에 시선을 묶어 두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창유리를 닦으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두터운 겉옷 때문인지 눈길 위에 더디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이 몇 보였다. 그들의 파리한 얼굴이 수은등 불빛에 잠깐씩 노출되었다가 사라졌다. 찰나에 가까운 짧은 시간, 그녀는 그들의 인상을 그로테스크하게 느꼈다.

퀭한 눈, 두드러진 관골, 추위에 질려 연둣빛에 가까운 얼굴 피부. 그녀는 틀과 유리의 좁은 연결 부위까지 세밀하게 닦아내고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눈이 내리는 바깥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에게는 하나의 객관화된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따위는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그녀의 시야는 한없이 좁아져 오직 그들의 온기 없는 얼굴 피부에 국한되었다. 저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것은 살갗일 뿐이다. 추위로 일그러진 피부, 수은 불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피부색, 의미 따위는 없는 거야⋯그녀는 미련 없이 창에서 몸을 돌렸다.

주전자의 물이 다 졸아 쇳내가 났다. 그녀는 예민한 기관지를 생각하고 마른 수건으로 주전자의 손잡이를 감싸 쥐었다. 그녀는 화실 밖으로 나와 캄캄한 복도를 걸었다. 눈 오는 거리보다 더욱 짙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평소의 감각대로 옮겨 놓는 그녀의 발짝 소리가 어둠을 무디게 흔들었다.

그녀는 벽을 더듬어 화장실의 불을 켜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도꼭지를 열어 주전자에 물을 받는 동안 세면대 위에 부착된 거울로 시선이 갔다. 거울은 치약과 비누 거품이 튀어 말라붙은 채로 지저분했다. 길고 여윈 얼굴이 들여다보였다. 움푹 패인 눈두덩이 부자연스럽게 까풀어졌고, 눈동자가 회색빛으로 풀어져 있다. 홀쭉하게 들어간 뺨, 하얗게 껍질이 일어난 입술, 그리고 가늘고 긴 목에 가로로 잘게 패인 주름들. 얼굴을 감싸 쥐고 비명이라도 지른다면 영락없이 뭉크의 그림 같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별안간 등골이 오싹하게 무섬증이 들었다.

주전자에 물이 넘쳤다. 그녀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주저앉아 수챗구멍에 오줌을 누었다. 오줌이 메마른 성기를 빠져나오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그녀는 일어나 주전자를 기울여 넘치는 물을 수챗구멍에 붓고 화장실을 나왔다.

화실로 돌아온 그녀는 난로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손을 맞잡아 비틀며 서서 할 일을 잃은 사람처럼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멀리, 눈 쌓인 도로를 핥으며 달려가는 자동차들의 질주음이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시리지도 않은 손을 뻗어 난롯불을 쬐었다. 어디선가 귀에 선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먼 카나리아의 울음 같기도 하고,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돗물 소리처럼도 들렸다. 수도꼭지를 제대로 잠근 것일까. 다시 화장실에 가서 확인할까, 하고 그녀는 망설였다. 잠시 후,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 수도꼭지를 틀림없이 잠갔다구.

그녀의 중얼거림이 텅 빈 화실에 기묘하게 울렸다. 주전자 물이 데워지느라 해수병 환자의 가래 끓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전자의 알루미늄 표면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난로 뚜껑에 떨어져 동들 동글해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철판 위에서 이리저리 튀어 오르던 물방울들은 희미한 소리를 끌면서 검은 자국을 남긴 채 증발했다. 주전자의 표면에 더 이상 물방울이 흐르지 않자 그녀는 시선을 거두었다.

저런 건 아닐까. 결국 저렇게 되는 건 아닐까, 하며 일어선 그녀의 얼굴이 데스마스크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커피를 준비하기 위해 그녀는 베니어 칸막이 뒤편으로 들어갔다. 한 평 남짓 되는 자투리 공간 속에 지저분한 식기들이 처박혀 있는 개수통, 중고품이 분명한 붙박이 찬장, 그리고 열댓 장 가량의 연탄 따위가 들어차 있다. 그녀는 개수통에서 큰 컵을 들어내 닦을 생각도 않고 커피 두 숟갈을 뜨고는 쫓기듯이 칸막이를 빠져나왔다. 소파로 돌아오던 그녀는 화실 구석에 희미하게 떠 있는 얼굴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십 초 후, 그녀는 형광등 불빛이 꺼멓게 죽어 있는 구석에 놓인 아그리파의 흉상을 향해 몹쓸 놈, 하고 중얼거렸다.

난롯가로 돌아와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고장 난 채 탁자 밑에 처박혀 있던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한참 그것을 밉살스럽게 내려다보던 그녀는 발끝으로 보이지 않게 밀어 넣었다.

탁자 위에 놓인 낡은 전화기의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녀는 구식 벨소리가 귀에 거슬려 잔뜩 눈을 흘겼다. 건물 주인이 세를 놓으면서 선심을 쓴 전화기였다. 그 전화기의 벨이 울릴 때마다 그녀는 거리에서 옷이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최신 전화기들의 호사스럽고, 귀를 즐겁게 하는 갖은 소리들과는 달리 그 벨소리는 그녀에게 궁색한 자신의 모습을 선명하게 일깨우는 천격스러운 것이었다.

그녀는 벨이 스무 번 울릴 때까지 전화기를 짜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외출했을 때, 번화가의 진열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유행에 뒤떨어진 깡똥한 오버코트, 거죽이 형편없이 갈라지고 굽이 짜부라진 부츠. 그녀는 불현듯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진열창에서 물러났다. 머리통 없는 마네킹이 무스탕 점퍼를 입고 한껏 몸을 비틀고 있는 진열창에 비친, 거리를 오가는 성장(盛裝)한 여자들, 그 시선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전화벨이 문득 끊겼다가 다시 울렸다. 그녀는 발작이라도 일으킬 듯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밖에 눈 오는 거 알어?

그의 목소리는 언제부터인지 그녀에게 파충류의 미끈거리는 비늘을 연상시켰다. 미끈거리는 목소리와 퍼붓는 눈과⋯⋯, 그리고 연둣빛의 인상들.

이봐, 듣고 있어? 또 수면제 먹은 거야?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계속 미끈거렸다.

약은 끊기로 했어, 오늘부터. 부르스타가 고장 났어. 가스를 새로 샀는데 말야. 난로에 물 올려놓고 기다리는 중이야.

말하고 나서 그녀는 행간이 뒤죽박죽이 된 교정지를 생각했다. 그는 출판사의 편집장이다. 그는 잔뜩 진지한 표정으로 <네 말투는 오자 투성이 교정지 같어>라고 말하곤 했다.

저런! 점화장치가 고장 났을 거야. 접때 보니까 잘 안되더라고. 성냥불로 켜보지 그래.

그래도 소용없어. 성냥 한 갑을 다 그었는데두. 괜히 가스만 맡어가지구 아침 내내 아편쟁이처럼 히죽거렸어. 머리도 깨지는 거 같구.

들러서 봐줄까? 

그것보담 하나 사줄 수 없어?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구차스러워서 뱉어낸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어 졌다.

알았어, 알았다구.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내 아파트로 들어와. 그럼 부루스타고 나발이고 궁상떨 거 없잖아. 그림이야 살면서도 얼마든지⋯⋯.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미끈거리는 도마뱀의 꼬리가 칼로 쳐낸 것처럼 툭 끊어져 나갔다. 아아, 그래도 도마뱀의 꼬리는 또 생겨난다지 아마.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한 것은 주전자의 물이 막 끓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녀는 벨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무심한 얼굴로 컵에 물을 따르고 천천히 저었다. 제대로 끓지 않은 물에 누르께한 거품이 떴다. 그녀는 컵을 입에 대었다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도로 내려놓았다. 연탄불을 갈 때가 지났음을 생각해 낸 그녀는 이마를 짚었다. 꼼짝 않고 몇 초간 그렇게 있었다. 전화벨은 집요하게 울렸다.

우리 한 지 일주일도 안됐어. 그리고 난 전혀 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수화기를 낚아채 들고서 소리쳤다. 맞은편 빈 캔버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들개의 그것처럼 번뜩였다.

이거야 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단지⋯⋯.

권태로운 악어가 말을 한다면 이런 목소리가 아닐까, 고 그녀는 생각했다.

알어, 안다구. 지금 야근을 하고 있다, 교정지가 산더미같이 밀려 있다,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보고 싶어서 전화한 거다, 화실로 갈게, 그리고 와서는 라면에다 소주나 한잔하고, 결국엔 내 팬티에 손을 집어넣을 테고. 아니야?

이거 봐. 다른 직원들 다 듣겠어. 소리 좀 낮춰.

그는 전혀 난처하지 않은 목소리로 난처한 듯 말했다.

커피맛을 망쳐놨어, 완전히. 그리고 나, 담배도 떨어졌어.

그녀는 머리칼을 쓸어 올린 손을 그대로 움켜쥔 채 울먹였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빈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참, 우는 거야? 그림이 안되는구나?

파충류의 피는 무슨 색일까. 그녀는 나이프로 캔버스에 155겔프그륀을 바르는 상상을 했다. 그보다는 130a블라우그륀이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음 말해. 사 가지고 갈게. 담배도 사 가지고.

부루스타, 아주 싱싱한 부루스타.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알았어, 갓 잡아 올린 싱싱한 부루스타 한 마리 사 가지고 갈게. 야, 근데 이거 눈이 너무 쏟아지는데 두어 시간은 걸리겠다.

그럼 오지 마.

아아니, 가긴 가지. 근데 거기서 발이 묶일지도 모르겠어.

알았어. 재워줄게. 하지만 나, 정말 하고 싶지 않아.

그는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왜 그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내게서 섹스만을 원하고 있다. 그림에 대한 열정 같은 건 이해하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없는 남자일 뿐이다. 설마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겠지? 바보처럼 외로움을 타는 걸까?

어디선가 카나리아의 희미한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이 흐느끼는 소리인지, 눈이 내려 거리에 쌓이는 내밀한 소리인지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울음을 그치고 일어섰다. 주전자를 내려놓고 난로의 뚜껑을 열었다. 마흔네 개의 선홍빛 구멍들. 모두 세 장을 때야 하는 난로인데도 그녀는 언제나 한 장은 재로 대신하곤 하였다. 그녀는 집게로 윗불을 들어내고 밑불을 끄집어낸 다음, 다시 윗불을 넣었다. 그사이 그녀는 두 번이나 이마를 짚으며 쉬었다. 연탄재 통을 그대로 둔 채, 그녀는 칸막이 뒤까지 두 번을 왕복하며 한 장씩 연탄을 날라와 난로에 넣었다. 꼬챙이로 뚜껑을 들어 올리던 그녀는 생각을 바꿔, 번개탄[着火炭]과 연탄 한 장을 더 가져왔다. 언제나 빈자리를 채우고 있던 연탄재를 끄집어내고, 번개탄에 불을 붙여 넣은 다음, 새 연탄을 올려놓았다. 삽시간에 매캐한 냄새와 연기가 화실 안에 가득 찼다. 그녀는 뚜껑을 닫고 서둘러 창가로 달려갔다. 창은 얼어붙어서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인가 시도하다가 그녀는 단념하고 마른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화가(畵架) 앞에 멈춰 선 그녀는 손을 뻗어 캔버스의 표면을 쓸어 보았다. 면사의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손끝에 먼지가 묻어났다.

여기 있는 게 아니야, 나는. 파리에 있어야 하는 거라구.

그녀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칸막이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는 복제된 마티스의 「호사, 정적, 쾌락」이 걸려 있다. 부유하는 잿빛 연기를 투과한 형광등 불빛이 화면 위에 떨어졌다. 점묘로 처리된 핑크와 옐로, 블루의 미묘한 배합과 직선으로 배열된 나무와 보트와 해안선, 그리고 나부들⋯⋯.   


  

내 사랑, 내 누이야,

꿈꾸어 보렴 거기 가서

단둘이서 사는 달콤한 행복을!

한가로이 사랑하며

사랑하며 죽을 것을,

너를 닮은 그 나라에서!

흐린 하늘의

안개 서린 태양은

내 영혼엔  신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눈물을 통해 반짝이는 

변덕스런 네 눈처럼.     

그곳은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

호사, 정적, 그리고 쾌락⋯⋯

►샤를르 보들레르, 「여행에의 초대 L'invitation au voyage」 중에서


그녀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여행에의 초대」를 아주 천천히 암송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거리에서의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질없어. 그따윈 모두 장식일 뿐이야. 한낱 껍질에 불과한 거라구.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내부에서 뜨겁게 타오르던 열정이 사위어들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의식했다. 자신의 일상이 한없이 가년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은 식어 가는 열정 탓이라고 생각했다.

5미터 앞 창유리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녀는 입고 있던 스웨터를 천천히, 한쪽 팔을 빼고 다른 쪽 팔을, 그리고는 라운드넥을 잡아당겨 벗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유방이 드러났다. 창유리에 벗은 윗몸이 희끄무레하게 떠올랐다.

꼭 늙은 오이만 같어. 그녀는 거무죽죽한 유두를 의미 없이 하나씩 잡아당겨 보고는 청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손바닥만한 분홍빛 팬티까지 벗고 나자 극심한 현기증이 그녀를 흔들었다. 그녀는 화가에 한 손을 짚어 몸을 의지했다. 화가가 쓰러지고 고정시키지 않은 캔버스가 떨어지면서 그 모서리가 그녀의 발등을 찍었다. 새하얗게 드러났던 속살에 금방 붉은 피가 맺혔다. 그녀는 주저앉아 상처를 손가락으로 눌러보고 손끝에 묻어 나는 피를 캔버스에 닦았다. 선명한 붉은빛이 올 사이로 번져 나갔다. 그녀는 열다섯 살 때를 떠올렸다. 밤새 어디론가 달려가는 꿈을 꾸었었다. 끝없는 돌밭이었다. 거칠게 모난 돌에 채이고 째어진 맨발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숨이 턱끝에 차오르고 더 이상 달려가다가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두 다리는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달음박질쳤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거친 돌밭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하늘에 창백하게 붙박인 태양빛이 그녀의 핏빛 발자국을 싸늘하게 비추었다. 몸부림치며 가까스로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아랫도리를 붉게 물들인 초경의 충격에 발작을 일으켰다. 좁디좁은 단칸방이었다. 에미가 돼갖구 딸년 뭘 가르친 거냐며 아버지는 어머니를 구박했고, 어머니는 자신이 쓰던 후줄근한 개짐으로 수습을 해주며 눈물을 흘렸다. 자지에서 피 쌌대요, 하고 놀려대던 어린 남동생은 오빠에게 쥐어 박혀 그악스럽게 울어댔다. 씨발, 이건 사는 게 아니라 지옥이야. 뛰쳐나가던 오빠의 눈에 눈물이 비치던 것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어느 사이 엎질러진 요강과 코를 찌르는 지린내, 피와 오줌으로 얼룩진 이불, 동생의 울음과 어머니의 눈물, 오빠가 뛰쳐나간 문틈으로 아버지의 담배연기가 빠져나갔다.

그녀는 상처를 눌렀다가 묻어난 피를 붓으로 터치하듯 캔버스에 닦았다. 발등에는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오한과 함께 구역질이 치밀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바닥을 짚은 두 팔이 맥없이 꺾였다. 그녀는 자신이 태엽이 망그러진 오르골 인형처럼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꺾은 채 몇 차례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천장을 향해 누웠다. 한결 구역질이 누그러졌다. 카나리아의 울음이 분명하게 들렸고, 격자무늬 천장이 까마득히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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