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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n 06. 2019

푸른 나부(裸婦)_02

단편소설집

2.

머리가 지독히 아퍼. 동동주였어, 그 술? 다시는 마시지 않겠어. 담배 좀 줘. 고마워. 휴, 당신 얘기를 듣고 싶어⋯⋯출판사 편집일이 뭐 어때서? 그래, 알아. 그런 느낌. 이대로 살다가 그냥 죽는 건가, 그런 인생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하는 그런 기분. 그래서 사진을 시작했단 말이지? 나쁘게 들리진 않네. 적어도 떠밀리듯이 살진 않겠다는 거 아냐? 그치만 하필 누드 사진을 택한 거, 혹시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는 거 아냐? 웃는 걸 보니 그렇다는 뜻이군. 다행이야. 당신은 비교적 솔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늘 스튜디오에서 내 기분이 어땠는 줄 알아? 누군가 내 벗은 몸을 보고 음심을 품는다고 생각해 봐, 그런 자리에서. 열 번이면 한두 번은 그런 인간들이 섞여 있기 마련이야. 그러면 난 금방 알아챌 수가 있어. 그냥 느낌으로 말이야. 피부로 느껴지거든. 순식간에 예술의 대상에서 섹스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셈이지. 누군가 내 몸을 보면서 발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끔찍해. 마치 강간을 당하는 기분이야. 더 이상 포즈를 취하고 있을 수도 없고, 일은 엉망이 되고 말지. 들어봐. 오늘은 어땠는지. 오늘도 난 새벽에 목욕탕에 다녀왔어. 일이 있는 날은 꼭 목욕을 해. 사진 동호회 일이 오랜만이기도 하고, 미대생들 워크숍보다는 분위기도 깨끗하고 해서 난 기분이 좋았더랬어. 사실 난 좀 마른 데다가 가슴도 작아서 사진 모델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편이거든. 가벼운 마음으로 가운을 벗고, 렌즈를 조절하는 소리, 셔터 누르는 소리,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발짝 소리, 작은 기침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어. 그건 평소의 내 습관인데, 그렇게 소리들에 집중하다 보면 그 소리들이 고운 입자가 돼서 날아와서는 살갗에 닿아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야. 그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이야. 그 느낌은 내게 남아 있던 일말의 수치심까지 잊게 해주거든. 그런데 아까 스튜디오에서 말야, 어느 순간부터인지 누군가의 흥분된 시선을 느끼기 시작했어. 대체 누굴까, 하고 나는 뜨거운 시선의 주인공을 찾아 눈을 돌렸지. 대번에 당신인 줄 알았어. 얼굴이 무척 상기됐던 걸 뭐. 기억해? 나와 눈이 마주치니까 얼른 카메라로 얼굴을 가렸던 거? 그런 당신을 보니까 기분이 누그러지데. 당신이 오히려 안쓰럽더라구. 먼저 말해봐, 내가 저녁 사 달라고 했을 대 기분이 어땠는지. 그랬군. 내가 보기에도 당황한 거 같았어. 솔직히 말할까? 일 끝나고 로비에서 마주친 거 우연이 아니야. 당신을 기다렸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어. 당신하고 함께 있고 싶었어, 눈이 마주치고 난 다음부터 줄곧. 당신이 내 주위를 돌면서 셔터를 누를 때마다 야릇한 흥분을 느꼈던 거야. 그런 기분 이해할 수 있어? 오랫동안 메말라 있던 몸과 마음이 촉촉이 젖어드는 느낌이랄까. 긴 가뭄으로 거북 등처럼 갈라진 강바닥에 문득 한두 방울씩 듣기 시작하는 빗물 같은 거. 내 안에서 완전히 타버린 줄로만 알았던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 변명 같지만 단순히 성적인 흥분만은 아니었어. 뭐랄까, 당신의 열정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이되는 기분에 사로잡혔던 거야. 내 표현 능력이란 게 참 형편없지? 아무튼, 그래서 이렇게 당신하고 있게 된 거야. 물론 나는 지금 만족해. 고마워,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야. 뭐? 짓궂은 거야, 아니면 취미가 고약한 거야? 아니, 기분 나쁜 건 아냐. 남자랑 자본 게 일 년이 넘은 거 같애. 안심해, 이런 거 상습적인 게 아니니까. 이상하네, 왜 그런 게 알고 싶지? 하긴, 얘기 못할 것도 없지 뭐. 좋게 말하면, 내겐 후원자 같은 사람이었어. 대학 때 아르바이트하던 레스토랑 주인이었는데, 유부남이었어. 이 학년 때부터 그 사람과 관계를 했어. 처음엔 술에 취해서 여관에 끌려가 당한 거였는데, 한 번 그러고 나서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고 말았어. 그리고 섹스라는 거, 경험해 보니까 뭐 그렇게 대수롭지 않더라구. 그 사람을 사랑한 건 아니었어. 난 열다섯 살 이후로 누굴 사랑한 적이 없어. 그렇다고 섹스를 즐기기에는 그 방면에 소질도 없고⋯⋯말하자면 그런 생활에 관성이 붙어 버린 셈이지. 그 사람은 내 어려운 사정을 알고는 부인 몰래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대주었어. 절박한 처지였으니까, 그거 거절할 수가 없더라구. 그저 날 도와주려는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어.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그 사람, 본색을 드러내더라구. 글쎄 나더러 아이를 낳아 달라는 거야. 부인이 애를 낳지 못한다더군. 세상에, 기가 막혔지. 그동안 학비를 대준 것도 아이를 낳아 달라고 했을 때 내가 거절할 수 없게 만들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거였어. 정말 괘씸하데, 남자들이란. 곰곰이 생각을 했지. 돌이켜보면 엄두도 못 낼 대학을 졸업한 게 그 사람 덕이긴 하지만, 뭐 내게도 그만한 권리나 자격은 있었던 거라구. 그가 내 처녀를 강제로 뺏었으니까. 도의적으로 그 정도, 책임질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데 이제 애까지 낳으라고 강요하다니, 고심 끝에 난 조건을 달기로 했어. 감히 그 남자가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말야. 파리에 유학을 보내 달라고 했어.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그게 내 꿈인 건 사실이었어. 파리에 가서 그림을 계속 공부하는 거. 몽마르뜨 언덕의 거리 화가도 나쁘지 않고⋯⋯그 정도로 큰 조건을 내세우면 어이쿠 이게 아니구나 싶어서 물러설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웬걸. 그 남자, 한동안 고민하는 눈치더니 부인의 동의까지 얻어가지구 유학 비용의 삼분의 일을 통장에 넣어 주지 않겠어. 나머지는 임신이 확인될 때, 그리고 아이를 낳았을 때 나누어주기로 약속을 했어. 난 두 눈 딱 감고 이건 내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 그 남자는 부인의 동의도 얻은 터라, 주기적으로 나를 만났어. 내게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진 셈이었지. 그 시간을 잘 참아내면 난 파리에 가 있게 되는 거였어. 나는 언제나 파리에 가 있는 나를 상상하면서 이를 악물고 노력했어.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애가 서는 기미가 없는 거야. 난 조급해져서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면서 검사를 받았지. 결과는 언제나 확실한 가임 여성이었어. 그렇다면 결론은 그 남자에게 이상이 있다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난 당신에게 이상이 있는 거 같다고 말해 버리고 말았지. 그 남자는 물론 펄펄 뛰더군. 자기는 그럴 리 없다는 얘기였어. 검사 결과는 무정자증이었어. 부인이 불임이라는 진단을 받자, 자기는 정상이라고 믿어버린 거였어. 기구하기도 했지, 내외가 다 불임이라니. 그래서 에펠탑이 내 눈 앞에서 와르륵 무너져버렸지. 철저하게 몸만 버리고 말이야. 하지만 난 깨끗이 물러나기로 했어. 그 남자, 안됐더라구. 얼마 뒤에 부인이라는 여자가 찾아왔대. 알고 보니 그 여자 쪽으로 집안이 꽤 괜찮은가봐. 여자가 위자료 비슷한 돈을 내놓더라구. 물론 파리로 날아가고도 남을 정도였지. 이건 다시는 남편을 만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의 뜻이라고 여자가 말했어. 그리고 아직 나이가 있으니 새 출발을 하도록 돕고 싶다더군. 그런데 말이야, 이상해. 이건 아니다 싶은 거 있지. 도저히 그 돈을 받아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머뭇거리게 하는 거였어. 아마 자존심 비슷한 거였나봐. 그래서 결국, 남편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남편 관리하는 건 이제 댁의 문제다, 돈은 필요 없다, 이 돈을 받으면 지독하게 비참한 기분이 들어서 죽을지도 모른다, 어쩌구 하면서 돈을 거절하고 말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수룩했던 거 같아. 내겐 두 번의 기회가 있었던 셈이야. 한 번은 그 남자 몰래 다른 씨라도 받아서 아이를 낳아주는 거였고, 또 한 번은 부인이 내민 돈을 두 눈 딱 감고 받아서 파리로 날아가는 거였지. 고마워, 그걸 심성이 착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주니. 아무튼 그렇게 끝났어. 그때 받은 선금으로 이 화실을 마련한 거야. 그러니까 뭐 전혀 몸만 버린 것도 아닌 셈이지. 이게 내 남자 얘기야. 어때? 사랑했었냐구? 아니라고 했잖아. 보고 싶은 감정조차 없어. 그냥, 패트런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편하잖아, 그런 생각. 그런데 당신 뭘 그런 걸 자꾸 물어? 내게 아무것도 아니면서. 웃기네, 참. 누드모델이 어때서 그래? 내가 뭐 나체광이라도 되는 줄 알아? 생계를 위해서 택한 일이야. 입시준비생들 가르치는 일, 우습잖아. 그보다는 이 일이 마음에 들어. 나름대로 매력이 있거든. 내 육체가 다른 이들의 예술혼을 빌어서 다시 현현된다, 멋지잖아? 벌이도 괜찮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냐. 나하고 했다고 해서 무슨 권리라도 생겼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 섹스는 그냥 섹스일 뿐이라구. 이젠 그런 얘기 그만둬. 다른 얘기를 해. 내 그림 얘기? 좋아. 대신 부탁 좀 할까? 저 창가에 가서 서봐. 당신을 그리고 싶어. 수줍어 하는 거야? 모델이 되는 기분, 그렇게 나쁘지 않아. 아니, 지금 그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게 좋겠어. 불은 켜지 않을 거야. 그냥 저 창으로 스며드는 수은등 불빛이면 충분해. 멋질 것 같아. 좋아, 크로키니까 조금만 그대로 있어. 몸을 옆으로 조금만 틀어봐. 휴, 남자들 참 안됐어. 그런 걸 달고 평생을 살아야 하다니. 물론이지, 그것도 그리는 거야. 특별히 커다랗게 그리고 싶어. 그게 내 느낌이니까. 열다섯 살 때, 난 이런 생각을 했어. 태어나면서부터 걸머지는 운명적인 굴레 같은 게 분명히 있다. 그 굴레를 아무리 벗어던지려고 해도 결국 그것은 남은 인생의 전반을 지배한다고 말이야. 지독한 가난이라든가 신체적인 결함 같은 것들⋯⋯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노력만으로는 안된다는 걸 난 일찌감치 깨달았어. 그래서 그림을 택했지. 그림으로써 나는 모든 것을 개혁하고 싶었어. 지독한 가난과 그렇기 때문에 규정되는 열등한 사회적인 신분, 폭력적이고 부당한 모든 권력과 권위 같은 것들을 말이야. 끔찍하긴. 그건 세상에 대한 증오심이나 질투하곤 달라. 나 자신의 의지로, 나 자신의 눈으로 본 완전한 나의 것인 그러한 새로운, 나만의 세계를 다시 창조해 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 이해할 수 있어? 그래, 어쩌면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 끔찍할 수 있어. 열다섯의 나이였으니까. 더 얘기할까? 그해 여름에 난 가족을 모두 잃었어. 우리는 산자락에 게딱지같이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에서 단칸 셋방에 살았더랬는데, 장마 비에 산이 무너져서 몽땅 죽고 말았어. 새벽이었어. 내가 신문 배달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서 한 백 미터쯤 걸어간 뒤였을 거야. 꽝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지옥 같은 방은 흔적도 없이 흙더미 속에 파묻혀 버렸어. 건달이나 다름없던 아버지와 지지리 고생만 하던 어머니, 중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공장에 다니던 오빠, 약간 반편이던 남동생. 그들 모두가 언제 세상에 존재하기나 했냐는 듯이 순식간에 내 곁에서 사라져 버린 거야. 가족들의 형편없이 구겨진 시체가 흙 속에서 끄집어내지는 걸 보면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어. 정말이야,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잘됐다고.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어. 당신, 얼굴이 너무 딱딱하게 굳은 거 같아. 조금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어봐. 당신 표정은 꼭, 그날 동네 사람들 표정하고 닮았네. 죽은 어머니 손을 매만지며 퍼질러 앉은 나를 빙 둘러싸고 들여다보던 사람들 얼굴, 난 생생히 기억해. 불쌍해하는 것도 아니고, 걱정스러워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위로하려는 것도 아닌, 뭐랄까, 혼자 살아남은 계집아이를 어쩐지 섬뜩한 느낌으로 바라보던 그 낱낱의 얼굴들. 억수로 퍼붓는 비에 흠뻑 젖어 파랗게 질리고, 바들바들 몸을 떨던 사람들⋯⋯됐어, 이제. 다 그렸어. 언제 다시 만나게 되면 정식으로 모델이 돼주지 않을래? 당신 몸은 근사한 데가 있어.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자, 이리 와서 날 좀 안아줘. 오래된 애인처럼, 그냥 안아주기만 해. 다른 사람한테 오늘처럼 얘기 많이 해보기는 처음인 것 같아. 내일 아침에 나 깨우지 말고 그냥 가줘. 아침에 당신을 보면 울음이 날 것 같아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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