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밤이 깊어 갈수록 기온이 더욱 떨어졌다. 눈발의 기세는 한결 누그러졌으나 완전히 얼어붙은 도로에는 오가는 차량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따금 제설 차량들이 커다란 차체를 떨면서 작업하는 모습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를 위해 제동을 걸었으나 택시는 이십 미터 이상을 미끄러지고 나서야 겨우 멈추었다. 와이퍼가 눈을 쓸어내는 둔탁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운전사는 교차로의 좌우를 살피고 나서 진입하는 차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출발했다. 그가 담배를 권했으나 운전사는 사양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와이퍼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좌에서 우로, 그리고 다시 우에서 좌로 메트로놈의 박동처럼 그것은 아다지오로 움직였다. 택시가 심한 경사로를 빠져나와 속력을 내자 눈송이들이 어지럽게 앞 유리창에 부딪혔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는 그렇게 생각한 것을 입 밖에 내어 중얼거렸다. 운전사가 이상한 눈으로 흘끔 쳐다보았으나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한 시간 전,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던 자신을 생각했다. 대설주의보를 핑계 삼아 사무실은 일찌감치 텅 비었다. 켜켜이 쌓인 <종말론>의 교정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는 사무실의 불을 끈 채 눈 오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사람들과 택시, 버스들이 도로변에 한데 뒤섞여 혼잡스러웠다. 끊임없이 경적이 울어대고, 택시 차창에 허리를 굽혀 행선지를 소리치는 사람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른 택시를 향해 달려가다 넘어지는 젊은 여자, 지붕 위에 한 뼘 가량의 눈을 인 채 엉거주춤 1차선에 정차하는 버스, 우르르 몰려드는 승객들, 닫히지 않는 자동문⋯⋯그 모든 것들 위에 소리 없이, 그러나 어쩐지 두려움이 느껴지는, 퍼붓는 눈. 그는 세계의 종말을 생각했다. 그 종말이 저런 폭설 속의 퇴근 시간만 같아도, 그것은 별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3층 사무실의 창유리를 통해 내다보이는 시야는 약 180도였다. 파노라마 사진기가 있다면 찍어 두고도 싶은 장면이었다.
마침내 그는 그 여자를 떠올렸다. 일주일이 넘었던가, 그녀를 언제 만났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즈음,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를 애써 마음속에서 지워내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써대고 있었던 것이다. 소파 위에 알몸으로 잠든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는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다. 새벽 네 시였고, 창백한 수은등 불빛이 화실 안에 비껴 들고 있었다. 그는 심한 두통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난로 위 주전자의 물이 졸아붙고 있었다. 그는 그 쇳내 나는 물로 커피를 만들어 마시고 옷을 주워 입었다. 그녀가 괴로운 신음을 하며 몸을 뒤틀었다. 그녀의 거웃과 성기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는 그녀를 깨우려다가 그만두고 창을 열기로 했다. 창문은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주전자에 남은 더운물을 모두 부어 창틀을 녹인 후 창을 열었다. 담요를 덮어 주어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미련 없이 화실을 나섰다. 다시는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대체 무슨 까닭으로 그녀와 헤어지려고 했던 걸까, 고 그는 책상으로 돌아와 스탠드를 켜고, 널려 있는 교정쇄 뭉치를 치우며 생각했다. 환멸스러웠던 것이다, 바로 그 새벽이. 그는 담배를 두 개비째 피워 물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 인간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하는 아득한 절망감에 그는 몸을 떨었다. 그것은 정확히 사진 동호회의 작업실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갖게 된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저녁을 샀고, 함께 술을 마셨고, 그리고 화실에 가서 섹스를 했다. 그것은 그가 전혀 예견하지 못한 의외의 일이었고, 그는 사실 애정이 없는, 상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전제로 되지 않은 섹스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말했듯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그를 강하게 지배했던 것이다. 섹스가 끝난 후에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려주었다. 섬뜩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뿐, 그녀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앞으로 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바라보고, 또 섹스를 한다고 해도 그녀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그때 이미 절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수은등 불빛을 받아 푸르게 물든 그녀의 나체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삶의 관성을 생각했다. 멈출래야 멈출 수 없는⋯⋯그것은 결코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물론이고 그 자신에게도 결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관계만 지속될 뿐인 것이다. 해서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화실을 나왔던 것이다.
그는 스탠드의 스위치를 껐다. 담뱃불의 빨간 불꽃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그는 훅 버튼을 누르고 화실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발신음이 어둠 속으로 울려 퍼졌다. 통화하는 동안 내내 그는 언구럭을 떠는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통화를 끝내고 나서도 그는 사십 분 동안 그대로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이해하고, 사랑하고, 섹스하고, 소유한다는 것. 그런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다. 애초에 존재하는, 전일적이고 영원한 본질. 그건, 열정이라는 거야, 고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열정: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것.
그는 보이지 않는 책상의 고무판 위에 손가락으로 그렇게 썼다.
여기 내려서 걸어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손님? 저 언덕, 올라갔다가 내려올 생각하니 끔찍한데 이거.
운전사가 언덕 위에 장명등처럼 불 밝히고 있는 수은등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비로소 깊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는 기꺼이 요금을 지불하고 잔돈도 마다한 채 택시에서 내렸다. 눈송이들이 바람에 희끗희끗 날리고 있었다. 그는 막 덧문을 닫으려는 가게에 들러 담배와 몇 가지 식료품을 샀다. 텔레비전에서 종영을 알리는 국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벽이며 전신주에 몸을 의지하며 겨우 언덕을 올랐다. 이층, 그녀의 화실 창으로 명명(冥冥)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건물로 들어서 어두운 계단을 올라, 복도를 걸었다. 벽을 더듬어서 화실 문의 손잡이가 손끝에 닿을 때까지 그는 질식할 것만 같은 기이한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는 몇 번인가 노크를 한 뒤에 대답이 없자, 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매캐한 냄새가 가장 먼저 그의 후각을 자극했고, 그는 온몸의 핏대가 딱 멈추는 충격에 비틀거렸다. 그의 손에서 식료품 봉지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는 창가로 허청거리며 달려갔다. 언젠가 그가 모델이 되어 섰던 바로 그 자리에, 그녀는 천장을 향한 채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녀의 반쯤 열린 눈동자는 완전히 풀렸고, 입가에는 피거품이 흘렀다. 고통스럽게 뒤틀린 팔다리가 이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그녀의 몸을 몇 차례 흔들어 보고, 찢어져 피가 엉긴 발등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젖가슴에 귀를 댄 채 그는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렸고,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 그녀의 차가운 젖가슴에 흘렀다.
어디선가 카나리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화가와 캔버스와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카나리아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독기를 머금은 공기가 화실 안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맴돌았다. 난로 연통을 빼낸 벽면에 부착된 가스배출기가 고장을 알리는 경보음을 내고 있었다. 그 경보음이 카나리아의 울음과 닮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출입문까지 비틀대며 걸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뒤, 돌아서서 문에 등을 기댔다. 형광등 스위치를 끄자 수은등 불빛이 그녀의 몸 위에 푸르스름하게 떨어졌다. 그녀는 다만 작가 앞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나부처럼 보였다. 적절한 두 손의 위치와 긴장된 가슴의 근육, 굴곡이 분명한 허리, 수은등 불빛에 원색으로 드러난 창백한 피부. 풀려 가는 그의 동공에 환멸의 빛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엄지손가락에 천천히 힘을 주어 손잡이의 잠금장치를 눌렀다. 멀고 힘들었던 여행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 방문을 닫을 때처럼, <딸깍>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잠겼다.